(사순절 제5주: 보라색)
말씀: 갈라디아서 2:15~21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목: 율법에서 믿음으로 (이광유 목사)
어느덧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지내십니까? 예수님이 참아내셨던 십자가에서의 고통을 일상에서 흉내 내기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까? 전 사순절이 되었다고 잘 먹던 음식을 갑자기 끊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나 쉽게 시작 할 수 있고 쉽게 그만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 년 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고 장문의 문자를 주변 사람에게 퍼나르거나 각종 관계통신망 대문 사진을 노란색으로 바꾸는 행동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말이지만 ‘냄비 근성’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저의 이런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율법에 사로잡힌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는 말이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편리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바울 서신은 사도 바울이 지중해 연안 곳곳을 여행하며 세운 교회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지금은 비행기로 사십 시간이면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지만 바울이 살던 당시에는 바다와 육지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각 교회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편지를 썼던 거죠. 바울이 쓴 편지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고 변증하는 기준인 성경책에 포함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누리망이 없는 시대에 그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전자 우편 제도는 빠릅니다. 빠른 소통 체계는 소통에서 발생한 문제를 보다 빨리 해결해 줄 것 같은데, 황급한 응답과 소통이 실은 더 큰 문제로 이어지죠. 다들 여러 번 경험하셨죠?
갈라디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의 원인은 유대교 율법학자와 지도자입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믿음’, 곧 율법의 무가치성을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유를 경험했습니다. 유대교가 정해 놓은 행동 강령을 독수리의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지키려고 노력할 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집착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도 그는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교묘하게 재해석한 사람들은 바울이 행동 강령이 없는 환상에 불과한 종교를 주장한다며 공격해 왔습니다. 바울의 변론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라디아서 3:24~26)
혹시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이란 제목의 영화를 보셨나요? 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 꼭 보시라고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26살 청년 이윤혁 군에 대한 기록 영화입니다. 희소암 말기 판정을 받은 그는 꿈을 꿉니다. 자전거 전문 선수들도 중도에 포기하고 너무 힘들어 그만 탈진하여 죽기도 했던 프랑스 전역을 달리는 세계 최고의 자전거 대회에 참가하고 싶었습니다. 암 제거 수술로 다섯 개의 장기를 이미 잘라냈기에 그 누구도 그가 3,400km를 완주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윤혁 군은 해냈습니다. 49일 만에. 이년 후 그는 앙상하게 마른 채 그토록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병원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참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간절히 원했던 걸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는 항암 치료를 끊고 프랑스로 날아갔습니다.
영화는 참 담담합니다. 우리네 삶처럼. 한국에서 세운 계획이 프랑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한 거죠? 영화를 만드는 이들과 영화에 출연하는 이들에게 일어난 좌충우돌, 진퇴양난을 영화는 담담하게 담아냅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산맥을 따라 달리는 윤혁 군을 영웅처럼 멋지게 그리지도 않습니다. 목적지인 프랑스 파리 시내 개선문에 도착했을 때도 윤혁 군을 맞아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그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간 그 자신과 그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함께 그곳까지 달려간 사람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탔던 두 명의 친구 만이 그의 완주를 축하했습니다. 영화에는 영웅의 귀환도 없습니다. 이년 후 피골이 맞닿은 채 병상에 누워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감상하는 윤혁 군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3~14)
지금도 제 마음속에 남아있는 영화 한 장면은 어느 밤 늦은 시간 자전거를 타면서 하염없이 우는 윤혁 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며 윤혁 군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전거의 페달 밟는 걸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율법. 옳고 그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율법은 결국 믿음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율법에 사로잡힌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맺어야 할 열매는 옳고 그름을 통해 우리가 우리 몸과 마음을 보호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마음, 곧 사랑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듯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율법으로 무장하여 안전하게 보호하듯이 다른 사람 또한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가? 이 태도에서 율법은 믿음으로 옮겨가고, 이 자세에서 믿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는 걸 기억합시다. 이번 한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기준에 충실합시다. 그리고 그 삶의 기준을 사랑으로 넘어섭시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진리를 참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율법이 믿음을 통해 자유에 이르렀다는 증거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율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믿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자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극복했다면, 믿음을 통해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유롭다고 마음대로 느낌 오는 대로 사는 게 아니란 걸 명심하겠습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아니하기를 꿈꿉니다. 그러기 위해 이번 한 주도 변함없이 우리가 달려야 할 삶의 자전거 페달을 밟아 저 높은 언덕을 향해 다시 나아가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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