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흰색)
제목: 훈련소 입소 날 (이광유 목사)
지난 한 주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거움이 제 마음을 눌렀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차이점에 대한 한 철학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대상이 분명할 때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라면 피하고 싶은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불안입니다. 그 원인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으니, 지난 한 주간 제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른 감정은 두려움이 아닌 불안이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절 말없이 유심히 살피던 처가 농담 반 진담 반 물었습니다. “당신 고난주간이라서 그런 거예요? 목사라서 고난주간을 진지하게 맞는 건가요?” “아니요.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데, 그걸 생각할 여력이 어디 있어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으로 걸어갈 때, 어떤 감정을 느끼셨을까? 두려우셨을까? 불안하셨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긴 골고다 언덕에 도착한 이후에 예수님은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낄 마음속 여유는 없었습니다. 손과 발에 박힌 못으로 인한 극심한 아픔 때문에 힘겨워하셨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두려움과 불안함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점점 강해지는 손과 발의 통증과 점점 약해지는 심장박동에 집중하셨기에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유대인의 새로운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삶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따라다녔던 스승의 죽음은 안타까움과 슬픔 그 이상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다는 두려움은 베드로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냐?”는 지극히 평범한 질문에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이 베드로는 펄쩍 뛰며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결국 살아서 십자가 밑으로 내려오지 않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혼란과 혼돈을 뜻하는 엠마오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을로 떠났습니다.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데 무작정 떠났다는 말이죠.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소리 지른 후 마지막 숨을 내쉬는 예수님을 지켜본 제자들은 한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군중심리라는 사회 심리학적 용어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집단행동은 평화로운 순간보다 위험한 순간에 더 잘 발생합니다. 놀이터에서 잘 놀던 아이들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옵니다. 두렵고 불안할 때, 우리는 혼자 있는 걸 꺼립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전 마가 다락방이라 알려진 장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렵고 불안해서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네 명의 아이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주며 한 달간의 시간을 줄 테니 스스로 답을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였고, 두 번째 질문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였습니다. 물론 처음에 아이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 답을 저에게 건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겨주시기 위해서라고. 글쎄요. 맞는 말이죠. 하지만, 전 그런 말이 아이들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게 좀 이상합니다. 마치 초등학생 일 학년 아이가 집에서 부모님의 가혹한 훈련으로 정치가의 연설문을 달달 외워서 말하는 거처럼 들리기 때문이죠. 그래서 두 번째 질문을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너희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 그러니까 하루하루 삶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지?”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해 하는 아이들에게 제가 들려준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돌아온 탕자”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합니다. 아버지, 첫째 아들, 둘째 아들이 이야기 속 중심인물입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주어질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두말없이 아들에게 재산을 떼어 줍니다. 보통 예수님은 비유를 위해 이야기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이야기에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즉, 아버지의 재산이 얼마만큼인지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쨌거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준 재산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나갑니다. 그렇지만, 그의 경험 부족은 그를 허랑방탕한 삶으로 내몰았고 그렇게 그는 전 재산을 날려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찾아왔고, 잘살겠다는 포부가 죽지는 않겠다는 오기로 변한 둘째 아들은 돼지 치는 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나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큰 깨달음에 이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누가복음 15:17~19)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먼발치에서 알아본 아버지는 한걸음에 아들에게 다가가 끌어 앉으며 하인에게 잔치를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누가복음 15:24)” 집으로 다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죽었다고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를 우리는 종종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있었기에 그가 집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맞습니다. 그렇지만, 둘째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에서 돼지로 전락한 그가 자신이 걸어온 삶을 뒤 돌아보며 진심으로 참회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바뀌었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커다란 깨달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후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꼭 신체에만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 태권도를 배우는데요. 점점 더 잘하면 잘할수록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과 싸워야 해요. 그래서 겨루기 시간이 제일 힘들어요. 이 아이랑 겨뤄서 이길 수 있을까? 아, 못할 거 같은데. 겁이 나요. 그런데 말이죠.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전 그만 죽어버려요. 몸이 죽는 게 아니라 정신이 죽는 거죠. 그래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저 자신에게 말해요. 잘할 수 있다고. 그러다 보면 전 다시 살아나요. 생각을 바꾸어서 제 삶 전체를 보다 긍정적으로 밝게 바꾸는 거예요. 제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서 배우는 건 바로 이 부활이에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부활절은 삶을 신앙으로, 신앙을 삶으로 바꾸기 위한 훈련소에 입소하는 날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한 어린이의 고백처럼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 몸과 마음을 사로잡을 때, 부활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훈련소에서의 삶은 고되고 피곤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자 신앙임을 마음속에 깊이 새깁시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일상에서 살아내야지만 그리스도인이란 걸 명심합시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던 디모데에게 했던 말은 오늘 우리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말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디모데전서 4:12~13)”
기도
하나님, 몸의 부활이 있기 전에 마음에 부활이 있어야 한다는 걸 오늘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낙심과 낙망, 절망과 후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낙심과 낙망, 절망과 후회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가 저 자신입니다. 당신의 부활 사건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용기와 지혜를 북돋아 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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