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주일: 보라색)
말씀: 빌립보서 4:6~14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제목: 신앙, 또 다른 세계로 (이광유 목사)
이주 전 어느 날 드류 대학교 교정에 있는 미국 감리교 역사박물관 이 층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서류 정리를 하기 위해 일 층으로 내려왔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년 전 이화여대 음악 대학원에서 한 교수님과 학생 몇 분이 연구 자료 조사를 위해 제가 일하는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그때 오셨던 분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미국 현지 특파원 비슷한 일자리도 육 개월 동안 할 수 있게 해주셨던 분들이라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있기 때문인지 무척 반가웠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 마지막 장을 마무리하기 위한 자료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미국에 들어오셨던 거죠. 뉴저지는 원래 일정에는 넣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여행 일정 변경으로 잠깐 방문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다 보니 어느새 박물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녁은 어디서 드시려는지 잠은 어디서 잘 건지를 묻다가 특별한 계획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전 그 선생님을 집에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었고, 그분이 도서관에서 조사한 자료 정리 작업을 끝내자 하룻밤 묵을 호텔까지 제 차로 모셔다드렸습니다.
20분가량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올여름에는 졸업하실 텐데, 졸업 후에는 뭘 하실 계획이세요?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실 건가요?” 그리 부담스러운 질문이 아닌데, 왠지 망설이는 게 느껴졌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지난 후 김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올 네이션 크리스천 칼러지에 갈 거 같아요.” “아니, 그럼, 또 다른 걸 공부하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요. 영국에 있는 올 네이션 크르시천 칼러지 모르세요?” “네, 모르겠네요.” “선교사 양성 학교인데요. 거길 가려고요.” “네? 선교사를 하시려고요?” “네.” 이번엔 제가 당황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운 분이 왜 박사 공부를 마친 후 곧바로 선교사를 하려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애써 억누른 후 제가 말했습니다. “음… 쉽지 않은 길일 텐데. 더군다나 여자 혼자서는.” “남편과 같이 갈 거예요.” “네?” 더 당황했습니다. “아니, 그럼 남편분은 아마도 직장생활 중이실 텐데, 그걸 접고 함께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가신다고요?” “네.”
약간의 침묵이 더 흐른 후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공부. 하실 수 있는 만큼 하셨다면 이제 그걸 바탕으로 사회생활도 충분히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고. 사회에서 해야 할 바를, 아니 경험해야 할 건 모두 다 경험한 후 종교로 귀의(歸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텐데요. 열심히 일해서 돈도 좀 많이 모아 둔 후 선교사의 삶을 사는 건 어떨까요?” 좋은 인재를 하나 잃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실력과 지식을 사회로 환원할 필요가 있을 텐데…’하고 생각했습니다. “삶과 신앙을 구별 짓고 싶진 않아요. 그냥, 치열하게 살고 싶어요…” 또다시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제가 아닌 그분이 먼저 말을 시작했습니다. “바름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고 싶어요.” “그럼, 그걸 남편 되는 분도 인정하고 받아들이신 거죠?” “그래서 결혼했어요.” “그러니까 결혼 전부터 두 분은 선교사가 되기로 함께 마음을 모으셨나요?” “네… 그냥 지금 한국의 기독교를 보면, 복만 받으면 된다는 복의 종교가 되었다는 게.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건지. 마음 아프고 복잡한 일이에요.” “네. 전 친구랑 이렇게 말해요. 그때 그 시절에 그렇게 (바르게) 생각했던 우리.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지?” 전 씁쓸하게 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새 제가 운전하는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짐을 챙겨 차에서 내리는 김 선생님을 배웅하기 위해 황급히 차에서 내리며 뭐라고 말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아무쪼록 미국에서 하는 마지막 자료 조사 마무리 잘하시고 논문도 잘 끝내세요. 그리고 앞으로… 건강하셔야 해요. 남편과. 두 분 모두.” 전 고개를 숙이는 인사 대신 악수를 청했습니다. 동등하게 평등하게 인사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오른손만 쑥 내밀었더니,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 선생님도 당신의 오른손을 쑥 내밀어 제 손가락 끝부분을 살짝 잡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제가 그분과 나눈 대화를 처에게 전했더니, 처는 “멋있으시네.”라는 대답만 건넸습니다. 김 선생님이 제게 남기고 간, 그것도 여행길에서 아주 잠깐 스친 사람에게 남긴 말 “치열하게”가 왜 이리 오랫동안 제 맘속에 맴돌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일이, 싫어하는 일이나 좋아하는 일이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섭리 (세상과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믿음)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고 산다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이란 말은 쉽게 써서는 안 됩니다. 예기치 않은 끔찍한 사고와 사건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에게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고통 속에 있는 당사자가 스스로 씨름하여 판단하여 결정할 부분이지 옆에 있는 제삼자가 끼어들어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꾸짖고 나무랄 수는 있을지라도 잘못한 사람이 이룬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죄는 미워할지라도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옛속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에 부합한다는 믿음은 자칫 잘못하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주장했던 율법에 사로잡힌 잘못된 신앙생활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 혹은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생각이 있죠. 내가 뭘 또 잘못했나? 이 질문은 정상적 질문입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은 이 질문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이 ‘그래! 내가 저번 달에 집안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십일조를 건너뛰었는데, 그래서 벌을 받았구나!’라고 생각하는 건 비정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에 얽매여 사는 삶의 폐단이 자유롭지 못한 삶이라고 했듯이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란 강박관념 (強迫觀念)은 신앙인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을 걱정하는 빌립보 교회 신앙인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4:6~13)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 사도 바울의 고백에 따를 때, 복 받는 지름길이 아닙니다. 복 받기 위해, 돈 많이 벌어서 모으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교회를 오가는 그 시간에 투자 이론에 대한 책을 사서 읽거나 경제학자가 한 세바시 15분 강연을 찾아 시청하는 게 더 좋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비결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배부름에 만족하고 배고픔에 만족할 줄 아는 비법을 배우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지금 우리가 일구어 가는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오늘 우리 손에 주어진 시간과 끈덕지게 늘어져 씨름하고, 그 와중에 흐르는 땀에, 피곤함과 고단함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네,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입니다. 이번 한 주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예수님이 묵묵하게 지고 가신 십자가를 우리 각자의 어깨에 올리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말할 겁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서 4:14)”
기도
하나님, 오늘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회 신앙인을 향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 어쩌면 우린 너무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쌓아나가는 걸 복이라 생각했는데, 사도 바울은 비워나가는 걸 복이라고 말합니다. 가능한 한 어려운 길은 피해 가는 게 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도 바울은 기회만 있으면 어떠한 길이든 묵묵하게 감사하는 맘으로 받아들이는 게 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걸어 올라갈 골고다 언덕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우리가 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매어야 할 십자가를 어깨 위에 올리겠습니다. 십자가의 무거움에, 쑤셔오는 허리에, 욱신거리는 어깨에 감사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04/23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4.24 |
---|---|
2017/04/16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4.18 |
2017/04/02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4.03 |
2017/03/26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3.27 |
2017/03/19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