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23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밑바닥 신앙
이런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걷고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자전거를 한 대 장만했습니다. 자전거를 타며 이제 다른 사람이 날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전거 옆을 자동차가 쌩하고 지나갑니다. 자전거는 자동차 앞에서 속수무책이죠. 그래서 다짐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를 한 대 사야겠다고. 종류는 상관없고 기름만 넣으면 굴러가는 자동차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자동차도 한 대 장만했습니다. 예상대로 아주 조그만 차였죠.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자동차를 운전해 도로에 들어섰더니 버스에 승합차에 봉고에 짓눌린 제 차는 저만큼이나 하찮고 약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경험, 한 번이 아니라 한평생 끝없이 하고 계시죠?
인간은 왜 만족을 할 수 없는지에 흥미를 느낀 사회심리학자들은 ‘행복, 인간은 과연 행복할 수 있는가?’란 주제를 마음속에 품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연구 결과는 여러분이 짐작하는 그대로였습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란 이걸 말합니다. 인간의 몸에는 좋고 싫은 감정이 끝없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달리면 걷고 싶고, 걸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그러다 대낮에 한 잠 푹 자고 일어나면 한심함에 짓눌려 짜증과 화가 납니다. ‘사회학적으로’란 이걸 말합니다. 자동차를 비유로 들어 말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엔진에 해당합니다. 지속적인 소비를 전제로 해야만 끝없는 발명과 생산을 순조롭게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제품은 우리에게 ‘혁신’이란 단어로 다가오지만, 실제로 신제품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느끼는 압박감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새로 나온 손전화기를 하나 장만하고 그 기능에 만족하며 행복해지려는 순간 그보다 더 나은 기능을 탑재한 새 손전화기가 출시되기 때문이죠.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연구 결과에 좌절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양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행복은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다.”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행복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란 말이죠. 곧,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건 행복이 아니라 ‘행복감’이란 말이죠. 햇빛이 쨍쨍한 날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면 우리 눈을 사로잡는 무지개가 나타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지개가 땅과 맞닿은 곳에는 황금 항아리가 숨겨져 있다고 하죠.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황금 항아리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 바람이 만들어낸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묻고 생각하고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은 이겁니다.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맛볼 수 있을까요?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사용한 각종 물품을 수거하여 바벨론 성전 보물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정치, 종교, 사회적으로 중요한 건물을 부순 후 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후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에 사는 귀족 집안 소년 중 똑똑하고 잘생긴 아이를 추려 자신이 사는 궁전으로 데려갔습니다. 한 삼 년 착실하게 교육해 바벨론 왕국을 위해 일할 일꾼으로 삼으려 했죠. 드디어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 아사랴가 성경책에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왕정 관리가 되기 위한 재사회화 교육의 첫 단추는 이스라엘 이름을 없애고 주어진 바벨론 이름입니다. 역시 일제치하 말기 문화정책 중 하나로 일본 정부가 한국인에게 한 일본식 성명 강요를 떠올리면 이러한 행위 속에 담긴 무서운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바벨론 사람들의 의식주에 적응하는 훈련이 따랐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민족은 지독한 민족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구별된 민족’이란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주말이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유대인의 전통의상을 떠올리면 제가 왜 이스라엘 민족을 지독하다고 말했는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다니엘서를 쓰고 편집을 거듭했던 성경학자들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한지를 본격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건네준 배경지식에 해당합니다. 이 배경지식을 건넨 후 성경학자들은 곧바로 다니엘이 어떤 소년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바벨론 왕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왕궁에서 바벨론식으로 살아가는 걸 거부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노예가 되어 강제로 바벨론 왕궁에 끌려왔습니다. 조상이 네가 누구인지를 알라고 선물로 준 이름을 빼앗겼고 바벨론식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던져진 꼴이라 이 두 가지는 어떻게 거부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하는 대로 이끌어가는 삶을 향한 의지는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성경 구절을 끄집어내 “다니엘처럼 우리도 포도주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안 됩니다!”고 주장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손가락만 붙잡고 늘어지기에 가능한 생각이죠. 포도주와 기름진 음식을 거부했다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신앙의 중심점을, 우리가 택한 삶의 방향성을, 포기하지 않고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얼마 전 제가 항상 가슴속에 품고 흠모하며 흉내내고자 노력하는 번역가이자 소설가 안정효 선생님이 1998년에 출간한 수필집 『하늘로부터의 명상: 청탁받지 않은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사서 책장에 보관해 두었는데, 역시나 어느 날 문득 읽고 싶어졌습니다. 지금까지 150권이 넘는 번역사를 출판한 한국 최고의 영문번역가, 미국에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이 영문 소설을 써서 미국에서 출간한 소설가, <코리아 타임스> 문화부 기자를 거쳐,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 편집부장, <코리아 타임스> 문화체육부장을 역임했던 사람. 번역은 눈과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귀로 하는 거라고 가르쳐준 스승님. 그저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던 위대하게만 여겨졌던 스승님의 내면을 차분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충격으로 다가온 사실은 안정효 선생님이 미국에서 출간한 영문 소설은 엄청난 실패가 낳은 창조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서강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 후 “영문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고, 그때부터 수없이 많은 원고를 미국 출판사에 보냈지만 단 한 번도 승낙을 받지 못했고 빈 책장에 꽂아 놓은 영어 소설과 함께 나이를 먹다보니 어느새 쉰 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죽기 전에 해 보는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며 영어 소설을 쓰기 위해 텍사스에 사는 여동생 집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작한 명상은 수년 뒤 한 권의 책으로 묶여 『하늘에서의 명상』이 되었습니다.
책 속에서 안정효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리라는 빤한 사실에 너무나 익숙했던 나는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 그나마 위안이었으며, 그래서 마지막 남은 숙제를 하듯이 고향을 떠난 나였다. (47쪽)”안정효 선생님에게 번역과 저술 활동은 삶이란 망망대해에서 정처 없이 떠돌지 않기 위한 방향성이었습니다. 글쓴이의 성격까지 번역서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의 대범함과 집요함은 목수였던 아버지가 남긴 폭력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당신의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강자에겐 한없이 약했지만, 집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직접 고무 바퀴를 찢어 만든 채찍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가족에게 폭력을 일삼았던 아버지와의 삶. 그런 환경에서 자라며 안정효 선생님은 만화와 영화에 빠졌고 그속에서 스스로 통제하며 창조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간 삶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의 세계 속에서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번역과 저술에 필요한 기본기를 하나둘 갈고 닦기 시작했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다니엘 1:11)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왕이 준 음식과 포도주를 먹은 아이보다 ‘정말로’ 더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는지를 따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건 험난한 인생길을 걷느라 늘어난 건 주름살과 굽은 등뿐이지만, 삶의 방향성을 여전히 마음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면, 마음속 북극성은 언제나 변함없이 깊은 밤하늘을 비추고 있다면, 여전히 우리는 올바르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 두 발을 삶에 중심에 딱 붙인 채 잘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의 삶은 앞서 간 이들에게는 위안과 평안을 건네고, 뒤따라오는 이들에게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줍니다. 이번 한 주도 삶의 밑바닥에 딱 붙은 채 마음속 신앙의 방향성을 포기하거나 잃지 않은 채 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새롭게 곱씹었습니다. 어린 소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삶의 방향성을 잃지 말라고. 신앙 북극성의 반짝거림을 포기하지 말라고. 현재 우리 삶의 현실이 밑바닥이지만, 밑바닥에 딱 붙어 뚜벅뚜벅 걸어가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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