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주일, 성령강림 후 제21주: 녹색)
제목: 살리는 여행
요즘 날씨가 얄밉죠? 아침저녁으로 기온 차가 적잖아 고뿔에 걸리는 사람이 많은 거 같습니다. 그래도 한낮의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면 가을이 영 얄밉지는 않습니다. 언제 그랬는지 파란 가을 하늘은 저 멀리 높아졌습니다. 과학은 우리가 우러러보는 하늘에는 물이 모여 만든 구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진작에 증명했지만,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면 자연스레 하늘을 우러러보는데 그런 절 저가 발견하면 혼자 씩 웃습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최첨단 과학을 굳게 믿고 사는 인간이 여전히 자연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일상을 잊고자 애쓰는 노력 속에서 ‘영적 본능’을 발견했습니다. 하긴 융보다는 한참 일찍 예수님은 이미 이런 말씀을 하셨죠?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제대로 잘 살 수 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를 육체의 배고픔과 영혼의 배고픔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배가 고프면 뭐라도 먹어야 하는 우리 신체처럼 우리 영혼도 주기적으로 영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영혼의 배고픔을 조금 더 쉬운 말로 풀면 삶의 ‘의미’가 됩니다.
삶을 의미로 수놓지 못할 때, 우리는 영혼의 배고픔을 느낍니다. 영혼의 배고픔이 몰려오면 불안함이 엄습하죠. 불안과 공포의 차이점은 잘 알고 계시죠?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대상과 마주쳤을 때, 느끼는 감정이 공포라면, 대상이 누구인지도 무엇이 원인인지도 알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불안입니다. 불안을 처음 철학적 주제로 삼은 독일 철학자는 독일어에서 ‘불안’이란 단어가 ‘목을 조이다’라는 동사에서 생겨났음에 주목했습니다. 조여오는 목을 풀려고 발버둥 치면 더욱더 강하게 조여지죠.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면 도망가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잠시 손에 붙잡고 있던 일을 내려놓고 “내가 지금 주어진 삶을 잘살고 있는가?”란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건넬 필요가 있습니다. 전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면 일기장을 꺼내 읽습니다. 수년 전 제가 바라봤던 세상, 제가 바라고 원했던 삶이 일기장에는 숨김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행스러우면서도 애석한 건 그때의 고민이 지금 제가 하는 고민과 별반 틀리지 않는다는 걸 제 일기장이 증명한다는 점입니다.
지난 주일 예배 때 우리는 삶을 신앙여행으로 바라봤습니다. 2016년 그루터기교회 목표는 “결심의 마침표는 실천이다!”, 실천 사항은 ‘두 번 생각했으면 실천하는 교회’라고 정했죠. 한 해 삶-농사를 갈무리해야 하는 이때, 진정으로 늦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 하지 못해 머뭇거린 걸 할 수 있다고 믿기에 여행을 떠나는 자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함께 읽은 마가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떠나보내며,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너희 삶을 살라고 명령하시며, 건넨 당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말할 때,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먼저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논리적인 글을 쓸 때,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하나, 둘, 셋 전개 방식에서 글쓴이가 제일 강조하고 싶은 건 보통 하나에 해당하죠. 이를 염두에 두고 마가복음 6장 7절부터 13절을 읽으면 예수님이 제자에게 한 당부를 우선순위에 따라 구별할 수 있습니다. 보통 가장 중요한 걸 듣고 나면 그다음 중요한 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리는 게 사람이니 오늘은 예수님의 덜 중요한 당부에서 중요한 당부로 순서를 뒤바꾸어 살펴보겠습니다.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 속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가 됩니다. 자유와 독립을 강요받으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를 굳게 믿는 우리는 이제 조금만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이내 ‘그래, 내가 떠나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삶의 어느 장소에 처하든지 떠나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한 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편지였습니다. 대통령과 한 상에서 밥을 먹을 때나 어린이와 한 상에서 밥을 먹을 때 똑같이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면 어른이 되었답니다. 떠나고 싶은 상황에 몰렸을 때마다 읊조리는 금언이 하나 있습니다. “똥을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 전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제자에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떠남보다 더 중요한 건 떠나는 순간까지 어떻게 거했느냐죠.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나그네 혹은 여행자에게 지팡이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징표입니다. 손에 꼭 쥔 지팡이는 어디에도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기도 하죠. 지난 주일 전 신앙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마음속에 새긴 공자 할아버지 말씀 중에는 이런 게 있습니다. 남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여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들이 어렵게 생각해 하길 꺼리는 일을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일상에 충실했던 사람만이 일상으로 벗어나는 신앙 여행을 잘할 수 있습니다. 한 주를 열심히 충실하게 살아낸 사람만이 의미 있는 예배, 의미 있는 영적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지팡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가지고 가라고 한 건 신발과 옷 한 벌이 전부입니다. 양식이나 배낭, 전대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광야살이를 떠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푼 맛나와 메추라기 기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르네요. 유명 상표가 붙은 옷, 그러니까 비싼 돈을 줘야지만 살 수 있는 옷을 입어야만 친구 사이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한평생 백화점을 몇 번 가본 적도 없는 부모님은 그런 옷을 입은 적이 없었기에 저에게 그런 걸 사줄 생각 또한 해 본적이 없으셨죠. 물론 모두가 다 유명 상표가 붙은 옷을 찾아 헤매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유유상종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 저처럼 유명 상표가 붙은 옷을 살 수 없는 친구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유명 상표가 붙은 헌 옷 혹은 진짜 같은 가짜 상표가 붙은 옷을 사서 입었고, 그 또한 할 수 없는 친구는 남의 집 빨랫줄에 걸린 유명 상표가 붙은 옷을 가져와 입기도 했습니다. 옷의 기능은 몸을 보호하는 건데, 유명 상표가 붙은 옷은 우리 몸을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주객전도 현상이 발생해 옷이 아닌 우리가 그 옷을 보호하기 때문이죠. 지팡이와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에게 삶에서 중요한 건 외면때문에 좌지우지하지 않은 우리 내면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 이주 전 목요일에 지누의 부러진 오른쪽 손목뼈가 잘 붙었는지를 확인하러 병원에 갔습니다. 한 달이 꼬박 지났지만 두 동강이 난 손목뼈는 아직 붙질 않았습니다. 엑스레이를 확인한 의사는 이 주 후에 다시 오라고 말한 후 손을 내밀었습니다. 악수하고 집으로 가라는 신호였죠. 한 달이 지났는데, 왜 뼈가 아직 붙질 않았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뼈가 부러진 후 좋아하는 축구랑 유도, 미식축구도 못하는 자신이 영 못마땅했던지 어느 날 지누가 불쑥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빠, 타임머신이 있으면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왜?” “그럼, 안 넘어지게 스케이트보드를 안 타면 되잖아요.”
며칠 후 잠자리에 누운 지누에게 다가가 제가 물었습니다. “지누야, 너 손목뼈가 부러진 후 후회를 많이 했니?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뼈가 부러져서 아무것도 못할까?’하면서 너 자신에게 화를 냈니?” “네, 좀 그랬어요.” “그럼, 지금부터는 그런 말 대신에 ‘지누야, 그럴 수 있어. 네 뼈는 빨리 다시 붙을 거야. 빨리 붙으면 다시 예전처럼 축구도 하고 유도도 하고 수영도 하고 미식축구도 할 수 있을 거야. 뼈야 힘내!’라고 말해봐. 그럼 뼈가 금방 붙을 거야.”한 주 후 지누는 의기소침에서 벗어났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은 우리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다양한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의기소침을 제어하여 활기로 바꾸는 능력이 우리 마음속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 가지를 덧붙이셨죠. 인생길은 혼자 걸어가는 게 아니라 영원한 길동무를 만들어 함께 걸어가는 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 여행은 사실 우리의 일상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여행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일상 속으로 떠나보내셨고, 일상을 충실하게 잘 살아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일상을 살리는 여행. 일상을 살리는 사람은 비일상,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 또한 살릴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 우리의 일상이 우리도 살리고 함께 살아가는 이도 살리는 그런 살림의 여행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예수님께서 제자를 떠나보내셨을 때, 건넨 당부의 말씀을 곱씹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했던 선입견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가라고 하신 여행은 기도원이 아닌 일상, 우리 삶이 펼쳐지는 가정이자 직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당부를 마음속에 새깁니다. 우리가 거한 곳에서 떠나는 순간까지는 그 거함에 정성을 다하기. 떠날 때는 지팡이와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만 챙기기. 여행의 핵심은 우리 마음을 잘 다스리며 이 여정을 함께 행하는 이와 깊고도 넓은 관계를 이루기. 우리 삶이 나와 다른 이를 힘들게 하지 않고 반대로 살리어 힘을 북돋워 주는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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