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6/10/30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10. 31. 20:23

본문

(종교개혁주일, 성령강림 후 제24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자맥질 개혁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1483 11 10일에 태어난 가톨릭 아우구스티누스회 수사이자 사제,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1517 10 31일 제성기념일(신앙의 본을 보인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 전야에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논제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다음날 모든 독일 사람은 루터 편에 서서 면죄부 판매 금지 운동을 일으켜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일어난 나름 큰 변화를 떠올려 보면 종교개혁은 알려진 대로 급격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결정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는 가톨릭 사제, 특별히 기득권 세력에 맞서 루터가 반박문을 꺼내 든 다음 날에도 세상은 그 전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왜 그런 쓸데없는 을 해서 다른 종교지도자의 삶까지 힘들게 만드냐고 따졌을 겁니다. 루터의 됨됨이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괜히 잘난 척 해봤자 손해를 보는 건 힘없는 사람이니 그만 조용히 입 다물고 없었던 일로 삼으라고 충고했을 겁니다. 달걀로 바위를 깰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변한 이는 오직 한 사람, 면죄부 판매 금지 운동을 시작한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자라날 대로 자라난 고민과 갈등은 95개 논제로 작성한 면죄부 반박문으로 옮겨질 때 새로운 용기와 힘을 루터에게 건넸고,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이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음을 자신에게 말했을 겁니다. 마르틴 루터는 1546 2 18 63세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95개 반박문을 작성한 34살에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29년간 종교개혁가로 활동했습니다. 지금도 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마르틴 루터가 홀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종교개혁을 시작할 수 있을지를 알려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시대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그가 자라며 만난 사람들이 그에게 남긴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그의 마음속 갈등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다양한 이론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기된 모든 이론이 진실로 인정하는 게 있는데, 그건 마르틴 루터는 개인적으로, 조금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종교개혁을 원했다.”라는 명제입니다.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면죄부 판매 95개 논제 반박문을 작성했다고 할지라도, 그 이후 29년간 루터는 종교개혁가로 활동하다 삶을 마감했다는 걸 고려한다면 루터 종교개혁이 시작한 곳은 루터의 마음속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개혁이 시작하는 곳은 마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극적 효과 때문에 사람들은 삭개오의 회개와 새로운 삶을 향한 그의 다짐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논리가 조금 더 발전하면 우리가 살아온 과거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마음속 구주로 모시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됩니다. 사람을 죽였어도 괜찮고, 사기를 쳐서 한 가정을 한평생 가난이란 동굴 속에 집어넣어도 괜찮고,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 절대 지워지지 않는 배신이란 상처를 마음속에 남겨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고백만 하면 하나님은 모두 다 용서하신 후, 덤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글쎄요. 이런 식으로 구원을 쉽게 얻는다면 기독교는 삶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윤리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한 용서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다른 이에게 어떤 고통을 안겼는지를 정확하고 차분하게 직시하고, 그 직시함 속에서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감정의 물결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후에만 사람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랑, 용서, 회개, 은혜. 우리가 좋아하는 말 중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뜸이 들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순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마비를 시키는 기적과 극적 요소를 제거해야 할 필요도 여기에 있습니다.


      몇 개월 전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 물숨이란 단어를 접했습니다. <물숨>은 기록영화 고희영 감독이 7년간에 걸쳐 촬영하여 완성한 영화와 책 제목입니다. 물의 숨의 줄임말인 물숨, 순우리말 같고 듣기 좋죠? 물숨이란 단어는 제주도 해녀들이 사용하길 무척 꺼리는 금기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숨을 쉴 때 해녀는 물속에서 죽기 때문입니다. 물숨은 물이 쉬는 숨입니다. 물이 어떻게 숨을 쉬나요?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물속에서 사람이 숨을 멈추면, 물이 숨을 쉽니다. 무슨 말인지 긴가민가하시죠?

      제주도 동쪽에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는데, 소가 바닥에 드러누운 모습과 비슷해서 우도(牛島)라고 부릅니다. 이 섬은 크기가 너무 작아서 누구도 이곳에다 사업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향해 올라오는 태풍은 어김없이 우도를 거쳐 가기 때문에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태곳적부터 우도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먹거리를 해결했습니다. 바다에서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직업이 해녀. 왜 남자가 아닌 여자가 바닷속에 들어가 먹거리를 건져 왔는지에 대해 아는 이는 없습니다. 태곳적부터 여자가 바닷속에 들어갔기에 바다의 여인을 뜻하는 해녀(海女)란 말이 생겼죠. 바다는 해녀에게 무료로 먹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바닷속에 숨어 있는 먹거리를 찾기 위해 해녀는 바닷속에 들어가야 하고, 바닷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삶의 가장 근본인 ’, 곧 들숨과 날숨을 포기해야 합니다. 일순간 삶을 포기해야만 바다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먹거리를 바다의 여인에게 건넵니다.


그런데 삶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 곧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데서 문제는 시작합니다. 1, 2, 3, 4. 우리가 참을 수 있는 숨의 길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해녀 할머니들은 한결같이 참을 수 있는 숨의 길이는 천성적으로 타고나기에 날 때부터 운명지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호흡이 긴 이는 깊은 바다에 들어가 남들이 쉽게 구할 수 없는 먹거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짧은 호흡을 가지고 태어난 이는 깊은 바다를 향한 꿈은 일찌감치 접은 후 얕은 바다를 끝없이 오가며 먹거리를 찾아내어 가정을 꾸려나가야 합니다.


물숨. 해녀들 사이에서 금기어인 물숨은 물속에서 해녀가 숨을 멈춘 순간을 뜻합니다. “물속에서는 숨을 그 누구도 숨을 쉴 수가 없잖아요?”라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물속에 들어간 해녀는 숨을 참으며 바닥으로 내려가 다양한 해산물을 주워 자신이 참을 수 있는 숨이 다하기 전에 물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물이 숨을 쉰다는 건 해녀가 물속에서 참을 수 있는 숨길이를 넘겨 기절하여 바닥으로 가라앉는 순간을 일컫습니다. 해녀는 철저하게 자신의 숨길이를 계산하여 물속에서 헤엄을 치며 먹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욕망에 사로잡힐 때, 막 물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려는 순간에 눈에 귀한 해산물이 들어왔을 때, 해녀는 그 해산물 하나 더 따기 위해 자기 능력의 한계를 잊어버립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거죠. 그래서 물숨은 욕망의 숨이라고도 불립니다.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의 마음은 처절했습니다. 절박한 사람이 문을 두드린다는 말처럼 삭개오는 절박한 마음으로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우도 해녀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바닷속으로 내려갔습니다. 저녁에 가족과 함께 먹을 저녁밥을 위해, 아이들 학용품을 위해 내려갔습니다. 삭개오도 우도 해녀들도 자신의 숨을 참으며 올라가고 내려갔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95개 논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붙일 때, 숨을 고르고 또 골랐을 겁니다. 해야만 하는 일.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가서는 안 되는 일.


오늘 우리가 함께 마음속에 새겨야 할 삭개오와 우도 해녀, 마르틴 루터가 한결같이 가지고 있었던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그와 함께 곱씹어야 할 건 태어날 때 우리가 가지고 나온 숨길이입니다. 얼마나 긴 숨길이를 가지고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숨길이가 얼마만큼 긴지를 정확히 알아 그 숨길이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개혁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개혁은 우리만 시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번 한 주가 우리가 가진 숨길이를 정확하게 알아 받아들인 후 삶의 바닷속으로 부단하게 자맥질해 들어가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맥질은 해녀가 바닷속으로 헤엄치며 들어가는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삶의 자맥질을 제대로 잘 하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불평과 불만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숨길이를 분명하게 알아 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의 숨길이를 안다는 게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여 체념하는 게 아니란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우리가 가진 숨길이 안에서 꾸준하게 자맥질하는 삶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이 번 한 주도 열심히 삶의 바닷속으로 자맥질해 내려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몸과 마음의 먹거리를 찾겠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물숨을 쉬지 않으려고 주의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