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6/10/02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10. 3. 09:42

본문

(세계성만찬주일, 성령강림 후 제20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신앙여행은?


      전 인생행로(人生行路)란 말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평생을 나그넷길에 비유한 말이죠.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 인생 여정(人生旅程)이란 말도 좋아합니다. 삶이 여행과 같으면 좋겠습니다. 떠남이 있으면 돌아옴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분명한 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삶은 인생 여정보다는 인생행로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가끔 삶이 꼬일 대로 꼬이면 어디에서 이 꼬임이 시작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시작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고 싶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갈림길에 이를 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 제가 내린 결정을 다시 되돌릴 가능성은 있는지?


이번 봄 부모님이 한국에서 오셨을 때, 아버지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한평생을 자동차 운전대를 붙잡고 살아오신 아버지는 앞으로 당신이 일구어야 할 삶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인자 느그들도 다 컸고 결혼해서 아들도 났고 이러케 사니 내가 더 바랄 게 머가 있노? 나야 머 집 있겠다. 차 있겠다. 그냥 나가서 이렇게 일하면서 먹고 살다 가는 거지.”아버지는 삶이 인생 여정보다는 인생행로에 더 가깝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 같습니다. 제게 성실하고 진실하면 처자식 굶겨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걸 삶으로서 가르쳐 주신 분이죠. 그저 하늘이 허락한 삶의 길을 걷고 또 걷다가 더이상 걸을 힘이 남지 않았으면 멈추면 된다. 아버지는 이 말씀을 제게 해주셨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인데, 인정하려니 괜한 머뭇거림에 우리 마음은 어지럽습니다.


성경책은 인생 여정의 시작점을 우리의 욕심과 욕망, 아집이라고 말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후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라고 자연 한가운데에 우리를 넣어주셨습니다. 자연의 흐름만 따라간다면 특별한 고통도 슬픔도 없는 참살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셨죠. 그런데 우리는 참살이가 싫었습니다. 어느 날 마음속 어딘가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욕망은 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저기 저 선과 악을 깨닫게 해주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으면 하나님처럼 똑똑해진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만큼 모호한 일은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부닥쳤는지에 따라 옳은 일은 그른 일로, 그른 일은 옳은 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하기 때문이죠. 판단을 시작하는 순간, 그러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이로운지를 계산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자연스러운 삶이 아닌 인간의 삶이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을 시작한 인간은 더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아셨기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


성경책은 자기중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이 발생했음도 알려줍니다. 내가 옳다라는 생각, 나만이 옳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자기가 한 행동의 엄중함을 깨달은 가인은 부모를 떠나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착하자,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하자, 내가 옳다라는 집착과 아집은 자라나 집단의 병이 되었습니다. 바벨탑. 또다시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욕심의 결과는 소통의 부재였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만 옳다고 주장했기에 누구도 자신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었고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일 수도 없습니다. 다른 이와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언어가 수백 가지 언어로 분열했다는 건 하나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후 자신 생각이 옳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하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때로부터 참만남, 참대화, 참살이를 갈망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중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라라는 이름의 한 남자는 칠십 세가 되어 세 아들 하란 (마르다)과 나홀 (코웃음 치다), 아브람 (큰아버지)을 낳았습니다. 세 형제 중 누가 큰 형인지 누가 막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는 건 결혼 후 하란만 사래, 밀가, 이스가와 롯을 낳았습니다.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하란의 아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데, 어쨌거나 아비 잃은 조카를 가족 내에서 거두려고 했을까요? 아브람은 형제 하란의 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래와 결혼했습니다. 어느 날 데라는 아브람과 사래,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중 하란이란 동네를 지나다 그만 거기에 눌러 살기로 작정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란이란 마을에서 데라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 하란이 생각났을까요? 왜 하필 하란이란 동네에서 데라는 여행을 그만두었을까가 궁금해서 몇 가지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보통 하란이란 이름은 물기가 없는 마른 상태를 뜻하지만, ‘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하란은 인생이란 길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도 마찬가지로 인생길 위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가 삶을 마감한 자리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땅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아브람은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나안에서 이집트으로, 이집트에서 네게브로, 네게브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롯으로, 롯에서 헤브론으로. 한 가지 놀라운 건 아브람의 여행 경로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전개되는 주요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의 후손은 모두가 다 아브람이 여행한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람을 걷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평생 걸으라고 명령하실까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세기 12:1~5)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야곱. 사기꾼이었죠. 야곱이란 이름은 발목을 붙잡다, 사기꾼을 뜻합니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형 에서의 발목을 붙잡아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했고,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그의 삶은 속임과 속임 당하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복을 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돈을 쫓아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 형보다, 엄마보다, 아버지보다 우선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은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속이며 살아왔으니 언제든 속을 수 있다는 걱정과 근심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더 많이 가지면 더 편안하리라 생각했는데,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불안해졌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 강가에 홀로 남은 야곱의 마음속에 천사가 찾아온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씨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밤새도록 싸우면서 알았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손에 쥐려고 했던 복은 진짜 복이 아니었다는 걸. 해가 뜨자 떠나려는 천사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진짜 복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사기꾼이 씨름꾼으로 변했습니다. 머리를 굴려 이익을 쫓던 이에게 지금부터는 몸을 움직여 땀 흘리는 삶을 살라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과 사람과 씨름하여 이겼다란 뜻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이스라엘은 아버지 이삭에게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합니다. 야곱의 삶은 참된 복은 참살이는 잘못된 복과 잘못된 삶을 극복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한 곳이 얍복 강가인데 얍복이란 단어는 비운다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손에 쥐고 있었던 걸 놓는 훈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딘가에 정착만 하면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이집트에 정착했을 때,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이스라엘에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시한 땅은 마음속에만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 땅은 힘겨운 삶을 묵묵하게 견디며 집착과 아집을 벗어던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 땅은 들어가기만 해야지 정착하면 안 되는 곳입니다. 신앙여행은 욕심과 고집으로 가득한 우리 삶으로부터 떠나는 여행입니다. 쥐지 않고 내려놓고, 직진 대신 돌아서 가고, 빠른 교통수단을 못 본 척하고 두 발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여행입니다. 이번 한 주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신앙 여행을 한 번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기도


하나님, 한 가지에 집착하면 그 한 가지 말고는 다른 걸 볼 수가 없습니다. 벌이에만 집착하면 벌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걸 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믿지만 삶은 점점 더 꼬이는 이유가 어쩌면 당신을 제대로 잘 믿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당신을 믿는다는 건 당신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곳을 향해 미련없이 걸어가기인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을 매무시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위로하여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