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22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물려 줘야 할 여행
지난주 목요일 아침에 지누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오른쪽 손목뼈가 심하게 부러진 후 사 주가 지났을 때,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손목뼈가 부러진 그대로였습니다. 이 주 동안 이걸 어쩌나 마음속으로 걱정했는데, 다행히 손목뼈는 부러진 흔적도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치 잘 붙어 있었습니다. 이제 부러진 뼈가 잘 붙도록 손목뼈에 박아 놓은 철심 두 개를 빼야 했습니다. 마취하고 뽑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사는 깁스를 제거한 후 그 자리에서 펜치로 철심을 뽑아냈습니다. 지누는 아프다고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고함을 힘껏 참았고 전 제 오른손은 지누 얼굴에 얹고, 왼손으론 지누 왼쪽 어깨를 붙잡은 채 제 얼굴을 지누 얼굴에 맞대며 아픔을 함께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픈 건 알겠는데, 얼마나 아픈지 그 정도를 전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똑같은 경험을 제 처가 지누랑 미누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갔을 때도 했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 정말 아프겠다고 생각은 할 수 있는데, 그게 얼마나 아픈지는 알래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경험해 본 적이 없으므로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4살에서 5살이 되면 ‘죽음’에 대해 눈을 뜹니다. 죽음이 잠과 다르다는 걸 인식합니다. 지누가 그 나이쯤 되었을 때, 한 날 제게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는 죽으면 어디로 가요? 하늘로 가요?” “응, 그렇지.” “엄마도요?” “응.” “그럼, 난 어떡해요?” 아주 난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고 배웠지만 태어나서 난생처음 삶의 한 면을 있는 그대로 깨우치고자 묻는 아이에게 얼렁뚱땅한 대답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지누야, 엄마랑 아빠는 죽으면 하늘로 갈 거야. 그런 후 바람이 되어서 널 지켜줄 거야. 이다음에 엄마 아빠가 네 옆에 없을 때, 바람이 불어오면 엄마 아빠가 네게 다가온 거란 걸 기억해야 해. 알겠지?” “네.”
한 달 전쯤이었습니다. 지난 6월에 다섯 살이 된 미누가 어느 날 저녁 함께 몸을 씻는 데,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아빠?” “왜?” “엄마, 아빠는 죽잖아요. 아니, 죽을 거잖아요.” “그렇지.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면 죽지.” “왜요?” “지금은 아빠가 힘이 세지만 할아버지가 되면 힘이 없어지고, 점점 힘이 빠지고 나면 죽는단다.” “아…” “그럼, 아빠는 죽으면 엄마랑 같이 하늘나라로 가요?” “그래, 아빠는 그러고 싶은데.” “그럼, 할아버지랑 할머니는요?” “먼저 하늘나라에 가 계시겠지.” “아빠, 그럼,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하늘나라에 가고 엄마랑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면, 이제 나랑 형아가 가야 하는데. 우리가 가면 어떻게 찾아야 해요?” “뭘?” “할머니랑 할아버지, 아빠랑 엄마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찾아요?”
형보다 상대적으로 늦게 말문을 터서 언어 감각이 형만 못하다고 생각했던 둘째 미누는 이제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한글과 영어가 짬뽕이 되는 형의 영어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형이 생각이 나지 않아 머뭇거리는 한글 단어를 조목조목 옆에 가르쳐주곤 합니다. 그렇지만 녀석이 ‘죽음’에 대해, 죽음 후의 삶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안했기에 녀석 몸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제 머리는 아주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글쎄, 너 어디로 와서 어떻게 엄마랑 아빠,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사는 집을 찾을지가 궁금한 거구나?” “네!” “걱정 마! 아빠가 네가 올 시간이 되면 집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도요!” “그래! 아빠가 엄마랑 같이 너 기다리고 있을게. 됐지? 그럼, 이제 가서 옷 입어.”
가끔 밤늦게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들기 전 처와 아이들이 자는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세 사람의 숨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우렁차게 코 고는 소리가 화음이 되어 들릴 때도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소리가 이어달리기처럼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몇 가지 떠오릅니다. 지금 난 잘하고 있나? 이 세 사람을 위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녀석들에게 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문학가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은 시집 「예언자」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화살과 활로 묘사했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화살인 자식을 저 멀리 날려 보내는 활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활과 화살의 관계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부모는 자식에게 직접 경험한 것 이상을 가르쳐서는 안 되고, 자신의 경험 너머로 나가는 아이는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튼튼한 활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누구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밭 같아서 겨자씨보다 작아지기도 겨자씨가 뿌리를 내린 후 자란 나무처럼 거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도 아닌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으로 인정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보고 천국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높였습니다. 안식일에 술주정뱅이와 함께 금지된 음식을 종교지도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거리낌 없이 맛있게 드셨습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위해서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 집으로 달려가 도와주셨죠. 그런데 속이 조금 켕겼지만 교회 수입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에 종교지도자들이 못 본 척 넘어가는 안식일 환치기와 제사용 동물 판매행위를 발견한 예수님은 채찍을 휘두르며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고래고래 고함질러 장사꾼을 예배당에서 쫓아냈습니다. 도무지 종잡기 힘든 예수님의 신앙심,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했을까요?
성경책에서 진보와 보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예수님 신앙생활의 시작점을 가장 잘 설명해 놓은 부분은 마태복음 4장 1절에서 11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예수님의 천국 운동을 결심한 인생의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천사와 악마가 협동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40일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방황하셨습니다. 광야 속에서 보낸 40일 없었다면 악마는 예수님을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통’을 찾아 견디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깨달을 기회를 놓쳤을 겁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게 좋아 마음이 평안할 때면 우리는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우리는 어떤 신념을 붙잡고 사는지,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되짚어 보는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광야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발견할 때입니다. 앞길이 막막할 때, 주변 사람이 모두 사라졌을 때가 바로 광야에서 길을 잃은 순간이죠. 광야는 갈등하는 우리의 마음이자 온갖 혼란한 생각이 가득한 우리의 머릿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발견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 세 가지는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이미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먹거리의 유혹, 종교의 유혹, 돈의 유혹. 40일간 광야에서 방황해 배고픈 예수님께 다가온 악마는 삶에서 가장 필요한 건 먹거리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결심했습니다. 몸의 배고픔보다 더 중요한 게 마음의 배고픔, 영혼의 배고픔이라고.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 아래로 떨어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자동판매기식으로 하나님 믿는 걸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실험할 대상이 아님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복권당첨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건 하나님을 가지고 노는 거란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악마는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보여주며 딱 한 번만 고개를 숙이면 그 모든 걸 선물로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세상보다 더 큰 존재인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일회적 만남이 아닌 깊고도 넓은 관계를 하나님과 맺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 가지 유혹을 극복해야 할 때는 우리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가 아니라 반대로 가장 힘겨울 때임을 몸소 경험하신 후 알려주셨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시작한 천국 운동은 오늘도 삶을 의미로 수놓으려는 이들의 마음을 힘들게 만듭니다. 타성에 젖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벗어나 다시 광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을, 넓은 문이 아닌 좁은 길을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걸은 삶의 발자국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우리 삶이란 활시위에 달아 저 멀리 날려 보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체험하신 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가 영원토록 물려줄 수 있는 건 우리가 몸소 살아낸 신앙의 지혜뿐이라고. 이 신앙의 지혜는 직접 광야에 들어가 경험한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다는 걸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운동에 동참하는 건 그래서 어렵습니다. 더 많이 머뭇거려야 하고, 더 많이 생각해야 하고, 더 많이 아파해야 하고, 그러다 내린 결단은 예수님처럼 과감하게 더는 미련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한 가지 아름다운 건 우리가 살면서 걸어간 길을 우리 아이들이 고스란히 따라 걷는다는 진실입니다. 이번 한 주 광야에서 힘차고 씩씩하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평안하고 따뜻하게 한 주를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신앙생활은 몸의 평안과 편안을 애써 외면하여 광야 속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에서 시작합니다. 2016년이 끝나기 전 당신이 가라고 명령한 곳을 향해 가기 위해 광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인도와 격려와 보호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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