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주일, 성령강림 후 제25주: 녹색)
말씀: 마태복음 20:1~16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딱 하루 먹거리
이 주 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뭐 그리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직접적으로 제게 일어나진 않았는데, 왜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한지 그 이유가 알고 싶어졌습니다. 지난 수요일 시간을 내어 일기장을 꺼내 제 마음속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생각을 적었습니다. 머리를 단련하듯이 몸도 단련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유도. 던져지고 또 던져지고, 꺾이고 또 꺾이고, 조이고 또 조이면서 유도장 가는 날이 되면 아침부터 마음이 부산해집니다. 어떻게 두 시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기서 죽음은 신체의 죽음이 아닌 마음과 정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오늘은 또 얼마나 던져지고, 꺾이고, 조일까를 걱정하며 도장을 향하는 저 자신이 한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파도가 몰려온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언덕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는 끝없는 공부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최순실’이란 이름으로 만천하에 공개된 한국 사회의 치부 때문일까요?
갑과 을. 금수저 은수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우리 삶의 상황이 ‘을’과 ‘은수저’ 같다면, 갈 수 있는 곳도, 할 수 있는 것도, 이미 운명지어져 있으니 괜히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오늘 한국의 현실은 말하는 거 같습니다. 모두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모두 한 가지를 잊고 있습니다. ‘최순실’ 씨를 신적 존재로 여겨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박근혜 씨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은 이는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였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지난주 월요일 한 상담학교 수업에서 학생 한 명이 제게 한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으로 ‘희생양’을 만들어 제거하려는 행동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희생양’ 제의는 보통 광기 어린 집단의 분노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사로잡힌 행동이 위험하다는 건 우리는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희생양 제의를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희생양 제의는 문제를 뿌리는 뽑는 게 아니라 집단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분노, 질투, 화, 광기를 한 대상에서 옮긴 후 그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주체할 수 없는 집단의 감정을 잠깐 차분하게 만드는 행동일 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잠시 잠잠했던 집단적 분노와 광기는 다시 증폭하고 또 다른 ‘희생양’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렇게 하여 이 비극의 수레바퀴는 하염없이 굴러갑니다.
한국의 한 철학자이자 교육자는 박근혜 대통령을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경제 성장이라는 가장 눈부신 업적을 달성했지만 동시에 가장 가혹한 군부정권도 만들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씨의 평범할 수 없었던 유아기, 소녀기, 청소년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철옹산성(鐵甕山城) 청와대에서 살았기에 그녀의 삶에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가징 기본적인 요소이기에 누구도 관심 기울이지 않는 ‘일상성’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삶에서 유일하게 일상성을 건네 주었던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그래서 특별한 상처로 그녀의 마음속에 남았을 겁니다. 어른이 된 어느 날 한 남자는 고 육영수 여사의 혼령과 접선했다며 연락해 왔고, 바로 그 순간부터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 사이의 관계가 시작했습니다. 일상성과 비일상성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대통령을 우리가 직접 뽑았다는 사실에서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화에 휩싸여 집단으로 ‘희생양’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의롭지만, 희생양은 우리를 속인 죄인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어린 시절 들었던 뽕짝 <세상은 요지경>이란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야이야이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인생 살면 칠팔십년 화살 같이 속히 간다. 정신 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참 맞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따라 불렀는데, 예배를 준비하며 다시 들으니 이 노래가 당시에 크게 인기몰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이 주간 제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처럼 착잡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요지경인 세상, 옳고 그름의 구별이 사라진 세상, 정의가 불의에 자리를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 불의를 치켜세워주는 세상에서 저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겠느냐는 질문이 다시 우리 앞에 던져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속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라는 전제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천국을 특정한 장소로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겨자씨 같은 천국. 누룩 같은 천국. 오늘 본문은 집주인과 같은 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있으신가요? 시작부터 이야기는 이상합니다. 하인이 있지만 주인은 직접 이른 아침에 밖으로 나가 일꾼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좀 이상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아랫사람이 해야 할 일은 건들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집주인은 직접 나가 포도원에서 부릴 일꾼을 구하고 하루 품삯도 흥정합니다. 더 이상한 건 아침 일찍 나가서 일꾼을 구했는데, 오전 9시가 되지 다시 밖으로 나가 일꾼을 더 구합니다. 12시가 되자 또 나갔고, 3시가 되자 또 나갔고, 해 지기 한 시간 전인 5시가 되자 또 나가 일꾼을 더 데려옵니다.
해가 지자 주인은 하인을 불러 일꾼들에게 그 날 한 노동에 상응하는 품삯을 지급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에서 진짜 이상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 일꾼이나 오후 다섯에서 와서 딱 한 시간만 일한 일꾼이 받은 품삯이 같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신성한 땀이 올바른 대가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건 신성한 땀에 대한 정의를 억압하는 행동입니다. 또한,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포도원은 포도를 생산하여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일꾼을 부리면 포도원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몇몇 일꾼은 화가 나서 주인에게 따지고 물었습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태복음 20:13~15)”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바를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깊이 곱씹어야 합니다. 그건 바로 품삯입니다. 여덟 시간 이상 일한 이나 한 시간 일한 이나 한 데나리온만 품삯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살던 때에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면 특별히 넉넉하지는 않지만, 하루 동안 가족과 함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더 함과 덜 함에 따라 주인은 품삯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직접 밖에 나가 일꾼을 찾았고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품삯을 놓고 의논한 후 한 데나리온이란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일꾼들은 적어도 오늘 하루는 또 가족과 함께 한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하며 포도원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습니다. 저축에 대한 기대도, 남보다 더 가지려고 바람은 처음에는 마음속에 없었습니다.
저는 한 데나리온이란 상징적인 말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건 모세의 지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사십 년간 경험했던 광야 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떠돌 때 계속해서 걸을 힘을 몸과 마음에 제공했던 건 하늘에서 떨어진 메추라기와 땅에서 솟은 만나였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민족에서 보내시며 하나님은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만큼만 가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가져간 건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썩어서 역겨운 냄새를 풍겼습니다.
한 데나리온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함께 엮어 생각하면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에서 해야 하는 노동은 광야에서의 행진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포도원 주인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생기는 살이, 곧 우리의 일상적 삶입니다. 정착하여 안정과 평안을 찾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곳이 우리 삶이죠. 일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신비는 오늘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는 일용한 양식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잊은 채, 은수저를 금수저와 맞바꾸고 ‘갑’질하려고 온갖 수를 다 쓰다 보면, 어느새 우리 삶에서는 썩은 냄새가 납니다. 받아 놓은 지 하루가 지난 만나와 메추라기처럼 우리 삶이 썩어 버립니다. 지금 우리를 불안하고 불편하고 분노케 하는 건 오늘 주어진 일용할 양식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서 나는 악취입니다. 그리고 그 냄새가 우리에게서도 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문제가 문제로 가시화되기 전에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순간은 지금이고 문제를 고칠 수 있는 곳은 일상임을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문제로 드러나면 당신의 가르침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그리스도인은 솟구치는 분노와 화를 경계해야 함 또한 알았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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