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주일, 성령강림 후 제19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에스겔은 엎드렸다.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주일이 오면 저 자신에게 묻곤합니다. 왜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청년주일을 가을에다가 넣었을까? 한자 말인 청년(靑年)은 푸를 청(靑)과 해 년(年)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졌습니다. 푸른 시간. 가을보다는 여름이 푸름과 더 어울리지 않나요? 그런데 청년주일은 여름이 아닌 가을에 담겨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제가 어릴 때 누나들이 즐겨 듣던 노래 한 소절이 생각납니다. 가수 이상은 씨의 언젠가는 이란 제목의 노래인데요. 이렇게 시작하죠.
젊은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같은 시간의 강위에 떠내려가는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이제 아셨죠? 왜 청년주일이 가을 한 주일로 정해졌는지? 젊다는 사실을 젊다는 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를 젊었을 때는 알 수가 없으므로 청년주일은 가을에 찾아옵니다. 한 달 전 제 첫째 아들 지누가 오른쪽 손목을 크게 다쳐 깁스한 후 전 유도장 어린이 강습 시간에 혼자 가기가 머뭇거려져 어른 강습에 합류했습니다. 그 첫날 저 말고는 모두 검은색 띠를 매고 있었기에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그래도 배운다는 자세로 겸손함을 마음속에 준비하여 열심히 강습에 임했습니다. 유도는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운동입니다. 반드시 제가 유도복을 붙잡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수 있는 상대방이 있어야지만 연습을 할 수 있는 운동이 유도입니다. 물론 제가 한 번 상대방을 바닥에 던지면 상대방에게 절 바닥에 던질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서로 한 번씩 고통을 주고 받는 거죠.
문제는 강습이 끝나는 십 분 경에 시작했습니다. 그 날 새로 배운 기술을 상대방과 연습한 후에는 연습 시합이 강습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지누랑 둘이서 연습 시합을 할 때는 기술이 아니더라도 힘으로 녀석을 제어할 수 있었기에 원하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유단자를 상대로 하는 시합은 그런 제 환상을 와장창 깨버렸습니다. 유단자니 조금은 쉽게 봐주겠지라는 제 기대도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상대방을 바꾸어가며 한 십 분간의 시합이 끔찍한 공포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열심히 낙법으로 제 몸을 보호했지만, 공중에 붕 뜬 후 땅으로 내리꽂는 제 몸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는 없었습니다. 몸이 아프니 겸손함은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다시 저 자신에 대한 화로 변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가 저 자신에게 한 말이 있는데요. ‘아! 십 년만 일찍 유도를 시작했다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몸의 반사신경이 어느새 제법 무뎌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제 몸은 이미 십 년 전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이 선지자로 변신하는 과정입니다. 전 지금까지 평범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선지자가 되는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다급함과 절박함이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에스겔 3장을 읽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건 하나님이 보내주신 다양한 신호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지가 하나님의 권능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에스겔 3장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며 먹으라고 명령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에스겔은 그 두루마리를 맛있게 먹는데, 하나님은 그냥 먹지 말고 ‘마음’과 ‘귀’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곱씹어 읽고 집중해서 들으라는 말이겠죠. 그 후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을 사로잡아 환상 속에서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생물 곁의 바퀴 소리를 들려줍니다. 이런 신비체험을 했다면 에스겔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을 겁니다. 감격에 겨웠겠죠. 그런데 에스겔은 근심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살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경험을 하면 어안이 벙벙할 때가 있죠? 에스겔은 지금 자신이 경험한 게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로부터 칠일 후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에스겔 3:17~21)
에스겔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줄이면 “에스겔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가 됩니다. 무지한 사람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깨우치려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한 번은 말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씨앗보다 더 중요한 게 밭이라는 말씀 기억나시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게 어떠한 자세와 태도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냐죠. 돌멩이 같은 자세와 태도. 가시밭 같은 자세와 태도. 비옥한 토양 같은 자세와 태도. 이 말씀을 마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들로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들로 나간 에스겔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책은 침묵합니다.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면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와 같은 영광이었다고 성경책은 설명합니다. 에스겔은 ‘엎드렸습니다.’ 엎드렸다는 말, 너무 단순하고 쉬운 말이죠? 그런데 에스겔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 순간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 후 엎드린 순간입니다.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은 쟁취의 신앙, 지배의 신앙, 업적의 신앙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사업도, 자식도, 삶도 잘 풀린다고 배웠고 그게 진짜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쟁취하지 않으면 지배하지 않으면 업적을 쌓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란 선입견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에스겔도 갈등했을 겁니다. 내 인생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나? 이제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면 삶은 더욱더 고단해질 텐데…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너 인자야 보라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에스겔 3:24~26)
우리네 인생살이도 에스겔이 선지자가 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순탄하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한순간에 평범한 사람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은 끊임없이 갈등했고 고민했고 하나님의 존재를 조심스럽게 깨달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엎드렸습니다. 이번 한 주는 이 엎드렸다는 말과 함께 씨름하며 사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에스겔이 봤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똑같이 그게 아니라면 비슷하게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당신께 엎드린다고 하면서도 그러지 않는 우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당신의 권능은 삶의 개선이고, 봉급 인상이고, 승진이고, 건강이고, 자녀의 우수 대학교 진학과 성공입니다. 그런 순간이 연거푸 일어나지 않으면 금세 우리 자신을 비난하고 당신을 비난하고 우리 주변 사람을 비난합니다. 하나님, 엎드림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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