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육진흥주일, 성령강림 후 제18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하늘의 열쇠라니?
지난 12일 한국시각으로 오후 7시 44분쯤 강도 5.0을 넘는 지진이 경주시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전 지금까지 살면서 딱 두 번 지진을 경험했습니다. 한 번은 초등학교 5, 6학년 때로 생각되고, 다른 한 번은 4, 5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그 날 전 어김없이 드류 역사박물관 이 층에서 역사문서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책장 전체가 일제히 오른쪽 왼쪽으로 기울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걸 보았습니다. 누리망을 통해 한국에서 발생한 지진소식을 들은 후 부산에 사는 부모님과 누나들이 걱정되어 어머니께 전화했습니다. “어머니, 지진이 났다는데, 괜찮으세요?” 아니나 다를까, “뭐, 우리야 괜찮지. 이제 살아봤자 얼마나 더살겠노?”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아니, 어머니, 그래도 한국이 원래는 지진이 없는 나라였는데, 인자 지진이 일본을 비켜서 서서히 한국으로 온다던데요.” 어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지진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들이 지진이 오면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야 안전하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대나무는 뿌리가 서로서로 단단하게 엉켜져 있어서 땅이 갈라져도 대나무 숲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그랬다.”
한국이 더는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으니 무엇보다 먼저 한국 지하철에 대한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기 위해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수하고 편리한 지하철 체계가 수도권과 중요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속을 달리는 기차라는 말 그대로 점점 늘어나는 지하철 노선은 한국 국토의 지반을 점점 더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학은 인류를 구원할 거라고 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더 오래 살고, 더 빨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더 많은 걸 경험할 수 있고, 더 큰 걸 소유할 수 있어진 게 정말로 우리 삶에 보탬이 되는 건지. 과학이 인간 삶에 보탬이 된다는 걸 부정하진 않지만, 화난 자연이 인간 세계로 몰려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본래 모습을 인정하게 됩니다. 대나무 숲을 불도저로 밀어 아파트를 짓지 않았다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삶으로 체득한 지혜를 학교에서 누리망에서 주워들은 지식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인정했다면, 경주 시민들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금은 더 차분하게 안전한 장소로 대피할 수 있지 않았겠느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16장은 우리가 모두 너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이였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천국 열쇠를 너희에게 주신단다. 천국 열쇠를 가지면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걸 모두 다 할 수 있단다. 이 천국 열쇠 받고 싶지? 성경책 열심히 읽고 기도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살면 받을 수 있단다.”
지난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천국 열쇠 하나 가지고 있을까? 여러분은 주머니에 천국 열쇠 하나 가지고 있으신가요? 전 없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천국 열쇠는 제가 살면서 본 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성경책이 잘못됐거나 제 삶이 잘못됐거나 둘 중의 하나는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을 새롭게 들여다보았습니다. 관념의 감옥. 천국 열쇠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와 같다는 등식을 지운 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은 제자들의 무식함에 난처함을 넘어 화가 난 예수님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변화를 보면 날씨는 예측할 수 있으면서 변하는 시대를 보며 다가올 미래는 왜 예측할 수 없느냐고 나무라신 후 ‘요나의 기적’ 말고는 보여줄 하늘의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자리를 옮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시죠. 깜빡 잊고 빵을 챙겨오지 못한 제자들은 배고픈 예수님이 이를 눈치챈 후 화가 나서 우회적으로 자기들을 꾸짖는다고 생각하여 이를 어쩌나하고 걱정했습니다. 제자들의 무식함에 화가 난 예수님은 ‘누룩’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허례 의식과 가식임을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다시 자리를 옮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건넨 질문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주제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란 짤막한 대답으로 인해 시몬은 예수님으로부터 새 이름 베드로와 천국 열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6:19)” 이 천국 열쇠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천국’이란 단어로 예수님이 암시한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건물 혹은 장소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천국은 끝없이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엄청나게 많은 방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삶에서 경험한 다양한 감정이 하나둘 셋 마음속 방을 이룹니다. 슬픔의 방. 분노의 방. 화의 방. 우울의 방. 겁의 방. 불안의 방. 죄책의 방. 화해의 방. 기쁨의 방. 여유의 방. 평안의 방. 회개의 방. 감사의 방.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 열쇠는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가 선택한 방의 문을 열 수 있게 도와줍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종종 분노의 방이나 화의 방의 문을 열죠. 그런데, 분노와 화로서 문제를 해결하면 정말 신기하게도 또 다른 분노와 화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우리 삶에서 발생하여, 결국 우리 삶 전체가 분노와 화에 휩싸이게 됩니다. 분노와 화의 불씨는 우리를 모두 태워 재로 만든 후에라야 사그라집니다. 옳은 일이다. 정당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하지만, 분노와 화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다치는 건 우리뿐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분노로 시작한 조그만 일이 우리 삶을 통째로 사라잡아 버린 경험, 모두 다 해보셨죠? 우리가 연 마음의 문 하나가 삶의 문, 세계의 문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반대로 끓어오르는 분노와 화를 삭이고 또 삭이면서 회개의 방과 감사의 방을 열면 견딜 수 없던 일도 견딜만한 일로 바뀝니다. 물론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분노와 화를 삭이려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게 너무나 연약한 우리 자신이죠. 과학 문명은 분노와 화를 삭이는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싫어 텔레비전을 틀고 음악을 듣고 다양한 여가 활동을 해보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오면 그 고통은 다시금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순간이 지나면, 그렇게 참고 또 참았던 게 잘했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우리 마음의 문이 하늘의 문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태복음 16:19)” 우리가 천국 열쇠로 여는 마음의 방문이 실은 하늘의 방문, 곧 우리 삶의 방문이란 걸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방 하나가 하늘의 방 하나와 신비롭게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이미 다 잘 알고 계셨죠? 이번 한 주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신 천국 열쇠를 특별히 더 소중하게 사용하려고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여는 마음의 문이 우리 삶의 문으로 연결됨을 기억합시다.
기도
하나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우리에게 주신 천국 열쇠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만족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천국 열쇠는 우리가 품은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이끄는지를 알려주는 암호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과 맞닿을 때 우리의 삶과 당신의 삶이 하나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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