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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9. 14.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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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연합주일, 성령강림 후 제17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견디기 정석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함이 무엇인지를 연구했습니다. 독특한 자기만의 철학 언어를 한없이 만들어냈기에 그의 철학은 어렵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는 어림짐작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존재 그 자체가 지닌 무궁무진한 신비로움을 그는 연구했던 거죠.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옮기면 살아있음의 신비로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있다는 신비로움을 언제 경험하시나요? 기분이 좋을 때죠? 맛있는 걸 잔뜩 먹은 후 포만감으로 스스로 졸음이 몰려올 때, 살아있음에 감사하죠? 함께 있어도 눈치볼 필요 없는 좋은 사람과 함께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때도 문득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가 마음속에서 생겨나곤 합니다. 또 어떨 때가 있을까요? 못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결국 해냈을 때도 살아있음에 감사할 때가 있죠.


하이데거는 살아있음의 신비로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게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만 인간은 살아있음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젊음의 소중함은 늙어서야 깨닫는다죠? 공부의 소중함은 공부할 때가 지난 후에 깨닫는다죠? 함께 자란 친구의 소중함은 어른이 되어 타지에서 생활해야만 알 수 있다죠? 사랑했던 님의 소중함은 옆구리에 허전함이 감돌아야 느낄 수 있다죠? 고향의 소중함은 고향을 떠난 후에만 알 수 있다죠?

      

      이주 전에 오른쪽 손목뼈가 부러져 수술한 후 팔꿈치까지 깁스한 지누가 제게 말했습니다. “아빠, 내가 만약에 타임머신을 만들 수 있으면 스케이트 보드 타기 전으로 돌아가서 스케이트 보드를 안 탈 거예요. 그러면 팔도 안 부러질 거예요.”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으면 좋겠는데오른손이 다치니까 많이 불편하지?” 지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부러진 뼈는 다시 붙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단다. 그래도 손이 부러지고 나니 손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알겠지?” 지누가 대답했습니다. “, 이젠 진짜 더 조심할 거예요.” 며칠 후 아침밥을 먹는데, 지누가 대뜸 물었습니다. “아빠, 아무개 전도사님은 왜 이야기할 때 한쪽 눈만 깜빡거리세요?” 처와 저는 눈을 마주치고 어떻게 대답할지 빠르게 생각했습니다. “아무개 전도사님은 아주 어릴 때 눈을 좀 다치셨어. 지누가 오른손을 다친 것처럼 아무개 전도사님은 눈을 다치셨어. 네 손이 아프듯이 전도사님은 눈이 아파. 네 손은 시간이 지나면 낫지만, 전도사님 눈은 지금도 아프단다. 힘드시겠지?” “.” 8년간 살면서 단 한 번도 자기 몸의 소중함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지누는 자신의 오른손이 부러져 사용할 수 없게되자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몸의 소중함을 스스로 깨우치기 시작했습니다.


      불교는 삶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쫓아다니는 고통의 원인을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욕심의 파괴성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욕심 없는 삶은 행복한 삶이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전 아직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욕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심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은 없다.” 제가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한 선생님이 언젠가 사석에서 저를 포함한 학생들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참 맞는 말이다고 믿으며 마음속 깊이 새기고 살려고 노력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하는 박사과정을 예로 든다면, 2년간의 교과과정을 마치면 종합시험과 논문 개요, 논문 작성은 오로지 학생의 의지로 진행됩니다. 종합시험의 시험 문제도 학생이 스스로 만들고 논문 주제도 스스로 정한 후 어떻게 논지를 전개할지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중요한 건 박사과정이 끝나는 순간까지 저 말고는 변하는 게 없습니다. 아니죠. 제 처도 저와 함께 나이를 먹고, 저와 제 처가 나이를 먹는 만큼 저희 두 아들은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주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절 발견하면 더럭 겁이 나기도 합니다. 더럭 생겨난 겁에 질린 날이면 잠이 오지 않아 고생하기도 하죠. 이런 잡생각을 없애주는 게 목표입니다. 그런데 목표는 욕심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목표를 다른 말로 하면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때, 분명한 이유 혹은 목표를 먼저 설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험난한 시련을 옹골차게 버텨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는 낯선 민족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 (예레미야 35:2)”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레갑 사람을 성전 한 방에 불러 모은 후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준비한 후 말했습니다. “, 여기 좋은 포도주가 있으니 우선 한 잔씩 하면서 모임을 시작합시다! 어서 한 잔씩 드세요.”그러자 레갑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 (예레미야 35:6~10)

      

      성경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레갑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오늘 함께 읽은 이 말씀이 전부입니다. 레갑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후 광야 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함께 따라 들어온 민족입니다. 레갑 민족의 시조가 누구인지 궁금하시죠? 레갑 민족의 시조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입니다. 이드로는 미디안에 살았고 금속가공업으로 삶을 꾸려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디안 토속 종교 제사장이기도 했는데요. 모세를 사위로 맞이한 후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 그는 아브라함과 비슷하게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금속가공업으로 살았던 이드로와 그의 후손은 본래 정착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 그들은 지금까지 꾸려온 정착민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유목민의 삶을 택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잘 믿기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맛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아시고 때마다 채워주신다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맛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걸 우리는 감사하게 받아야 한다로도 이해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 여기저기에 산재한 맛나와 메추라기에 정신이 팔려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그늘에 가려 있는지 없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던 레갑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자신들이 미디안을 떠날 때 마음속에 품은 다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집을 짓지 않기. 농사도 짓지 않기.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 문명을 거부한 채 자연인으로 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아집을 욕심을 최소화하면서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안주하려는 욕망. 다른 이보다 더 많은 걸 소유하려는 욕망. 순간의 쾌락에 사로잡히고 싶은 욕망. 이번 한 주는 레갑 사람들의 견디기 방법을 일상에서 한 번 실천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고단하고 피곤하고 짜증스러워 우리를 한계점까지 몰아붙이는 삶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일 수도 있거든요. 집을 짓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하루하루 하나님께서 허락한 삶의 깊이와 넓이에 감사하는 삶. 상상하기 힘드시죠? 그런데 그렇게 끈덕지게 견뎌온 레갑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혼날 때, 칭찬을 들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은 그곳에 넘쳐나는 기회에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혔습니다. 큰 집을 지어 뽐내며 살고 싶어졌고, 농사를 크게 지어 돈도 많이 벌고 싶어졌고, 때마다 잔치를 벌여 즐거움에 사로잡히고 싶어졌습니다. 그런 삶이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내몰았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를 구별했고 지켜나갔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왜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레갑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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