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11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바른 삶은 살아남는다?
붓다는 우리 삶에 가득한 고통의 원인을 고집 혹은 아집이라고 말했습니다. 잡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걸 우리는 끝없이 움켜쥐려고 하는데, 보통 열정과 노력이란 단어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우리의 행동이 이에 해당합니다. 얼마 전 드류 대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한 여자 전도사님과 개인적으로 마주 앉아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른 대학교 도서관을 일일이 찾아다닌 적이 없어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제가 다니는 드류 대학교 도서관은 여름과 겨울 방학이 되면 찾는 이 한 사람 없는 빈 건물로 변합니다. 물론 5층 건물을 샅샅이 둘러보면 교직원과 대여섯 남짓의 학생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여름 방학 중 그 여자 전도사님은 도서관 한쪽 구석 대학원생 전용 책상에 홀로 앉아 마음의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냉방기 없이는 여름을 나지 못하는 우리는 냉방기 없이는 공부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추워서 옷을 껴입고 공부를 해야 하는 도서관에서 그 전도사님은 땀을 흘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마음속으로만 땀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박사 과정 진학을 준비했던 몇 년 전 제 여름 방학이 생각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공부를 홀로 외롭게 해야 했던 때였습니다. 영어 시험을 준비해야 했는데,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 순간이었습니다. 격려해 주고 싶어서 지나가다 반갑게 나눈 인사는 결국 박사 과정 진학을 준비하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마음의 갈등을 주고받는 순간으로 흘러갔습니다. 남들이 하니 나 또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달려들었지만, 막상 해보니 쉽지가 않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삶은 안정적으로 변할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는데, 살아보니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박사 과정 진학과 이에 대한 집착이 그 전도사님의 마음속 고민이었다면 이를 바라보는 박사 과정 학생은 또 다른 마음속 고민을 품고 있었습니다. 졸업할지라도 제 삶에서 저 말고는 변하는 게 없을 박사 과정. 박사 학위증을 위해 쏟아부은 돈과 시간이 아깝지만 더는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안타까움과 그래도 해내야만 한다는 의지가 묘하게 뒤섞인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때에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읽은 이사야서는 도리어 제 마음에 폭풍을 불어 넣었습니다.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33:14~16)”
공의로운 사람, 정직한 사람, 남의 물건을 함부로 빼앗지 않는 사람,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때리는 말은 듣지 않으려는 자, 악을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 살아보니 이런 사람이 잘되는 경우 보다는 잘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걸 자연스레 깨달았습니다. 다른 이와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정직이 언제나 최상의 정책이 될 수는 없음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금까지 믿은 잘못된 신을 모두 던져버린 후 오직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하고 복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네 삶은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경고하십니다.
살아보니 공의로운 사람보다는 공의롭지 못한 사람이 더 잘 사는 거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이익을 건네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적절하게 잘 구별하여 나름 지혜롭게 이 말 저 말을 시기적절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승진도 빠르고 삶에 유용한 기회 또한 잘 포착합니다. 다른 이 험담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거 같습니다. 전 의식적으로 험담하는 걸 잘 들으려 하지 않고 또한 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건 그러지 않는 순간 험담하고 험담 듣는 걸 즐길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는 걸 반증합니다. 모두에게 선하려고 노력하면 모두가 우리를 깔보는 거 같습니다. 이런 저의 개인적인 깨달음보다 더 큰 문제는 제가 어렸을 때 제게 이사야가 대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참말이니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제 선생님, 전도사님, 목사님 또한 실은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긴 저 또한 말함과는 상반된 행함에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가끔 제 첫째 아들 지누가 “아빠는 전에는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은 왜 또 이렇게 말해요?”라고 물을 때면, 화끈거리는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며 아빠의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말할 변명거리를 찾느라 무척 바쁠 때가 있습니다.
바른 삶은 살아남는다?란 제목은 실은 지난 금요일 아침 주일 설교를 준비하려 할 때 제가 저 자신에게 물은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까? 논술이 아닌 단답형이라 대답을 정하기는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가진 신앙의 상태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즉, 바른 삶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대답을 택하셨다면 그건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는 신앙인이 아니란 걸 드러냅니다. 바른 삶은 살아남는다고 대답하신다면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은 우리에게 더욱 더 큰 도전을 건넵니다. 과연 우리는 입으로 시인하는 걸 행함으로 증명하고 있는가? 즉, 바른 삶을 일상에서 살아내고 있는가? 주변 사람을 공의롭게 대하고 있는가? 정직한가? 다른 이의 물건을 우리 것만큼 소중하게 여기는가? 뇌물에 따라 마음이 변하지는 않는가? 다른 이를 뒤에서 험담하거나 그런 말 듣기를 좋아하지는 않나? 악을 멀리하는가?
이사야의 바른 삶이 살아남는다는 말은 세상의 끝을 전제로 할 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종종 세상의 끝에 다다를 때가 있지요?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 사망 소식, 해고 소식, 사기 소식을 접할 때 우리 마음은 절벽 끝에 매달립니다. 친구로부터 왕따를 경험할 때, 될 거로 생각했던 일이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갈 때, 우리 마음은 세상의 끝에 다다릅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지요? 혹시나 이 일의 원인이 우리의 지난 행실에 있는 게 아닐까? 단 한 번도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옛날 우리가 행한 실수가 주마등과 같이 스쳐 지나갈 때가 있죠? 그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무심코 아내에게, 남편에게 내뱉었던 차가운 말 한마디. 홧김에 매몰차게 외면했던 아이의 다가옴. 손익계산 끝에 냉정하게 거절했던 친구의 부탁. 누구도 우리에게 가르쳐준 적 없는데, 우리는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일상에서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 우리 삶의 큰 물줄기가 된다는 사실을.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른 삶은 우리 삶의 순간순간을 시간의 끝자락이라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참말입니다. 삶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렇게 살아낸 사람은 담담함과 겸허함으로 우리 삶의 마지막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8장에서 오늘 우리가 이사야를 통해 들은 바른 삶을 물의 특징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사람됨을 갖춘 사귐, 믿음직한 말, 정의로운 다스림, 힘을 다한 섬김, 때를 가린 움직임.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을 일도 없습니다. (도덕경 8장)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간 드류에서 함께 공부했고 같은 세탁소에서 3년을 함께 일한 형이 어느 날 제게 물었습니다. “광유야, 강한 놈이 살아남을까? 살아남는 놈이 강할까?” 전 강한 놈이 살아남는다고 했고, 형은 그날 제게 살아놈는 놈이 강하다는 걸 알려주었습니다. 삶의 절벽에 매달렸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른 삶, 곧 물과 같은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 삶의 절벽을 기어오를 때, 바른 삶으로 무장한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바른 삶과 바르지 못한 삶의 기준이 우리의 일상임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실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삶의 절벽이란 걸 알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바르게 사는 우리가 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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