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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8. 8.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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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12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날갯짓


          성경책은 수많은 책을 하나로 묶은 모음집입니다. 구약이 39, 신약이 27, 66권의 책을 모아 만든 책이 성경책이죠. 읽다 보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책도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책도 있지요. 구약성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무슨 책인가요? 무슨 책인지를 결정하셨다면 왜 그러한지 또한 물어도 될까요? 개인적으로 전 창세기를 좋아하는데요. 그 이유는 창세기가 성경 전체 이야기의 원형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어쩌다가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지구에서 인생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아브라함의 믿음에 따른 여행, 이삭의 희생적인 삶, 야곱의 씨름, 요셉의 꿈. 인물 하나하나의 인간성과 그들이 삶에서 경험한 다양한 사건이 가장 자세하게 설명된 책이 제 눈에는 창세기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설명문이 아닌 이야기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설명문과 소설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죠? 설명문은 닫힌 책입니다. 지은이의 의도를 파악하면 더는 읽을 이유가 없는 책이 설명문입니다. 반대로 소설은 열린 책입니다. 읽는 이는 저마다의 관점을 가지고 소설을 대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정답이 없기에 모두가 다 정답이 될 수 있는 책이 소설입니다. 삶에 대한 경험이 쌓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무르익을수록, 태도가 바뀔수록 새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소설이죠.


          가장 좋아하는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이젠 가장 싫어하는 책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같은 맥락에 머물기 위해 구약 성서 중 가장 싫어하는 책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하죠. 구약 성서 중 가장 싫어하는 책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슨 책이죠? 그리고 왜 그 책을 유독 싫어하십니까? 개인적으로 전 요즘 예언서에 대해 적잖은 거부감을 느낍니다. 하루에 두 장씩 읽어나가는 성경 읽기 목록에 따라 현재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데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무서워도 너무 무섭고, 잔인해도 너무 잔인하고, 매정해도 너무 매정하다.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고난과 시련을 건네시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모두가 다 잘 아는 진리죠. 하지만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입니다. 당신이 직접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어느 정도 고난과 시련을 맛보게 한 후에는 구원을 약속하셨지만 다른 민족에게 구원의 국물도 허락하지 않는 매정한 태도를 유지하십니다. 나라 전체의 초토화를 넘어 한 민족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리겠다는 말씀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종말의 때. 시간이 멈추는 때. 삶에서 막장에 다다른 때, 모든 걸 분명하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는 선택받은 민족에게는 위안이 됩니다.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민족에게는 이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을 겁니다.


          얼마 전 반기독교 시민운동연합이란 누리집에 가입했습니다. 한국 근대사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다 정치와 종교가 손을 맞잡은 기록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는데요. 그런 와중에 반기독교 시민운동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고 반기독교 시민운동연합이란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글을 쓴 학자는 신학대학교 교수였기에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민운동연합의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 기독교의 공신력이 떨어졌음을 반증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오늘내일 혹시나 시간이 나실 때, 이 누리집에 접속하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성경책 19금 지정 촉구를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란입니다. ‘이게 뭐지?’ 궁금증이 몰려와 서명을 촉구하는 글을 한 번 읽어봤습니다. 수 천 년 전에 쓰인 성경책을 하나의 완벽한 책으로 상정한 후 그 속에서 발견한 오류를 하나둘 조목조목 짚고 있었습니다. 대다수 오류는 오늘 제가 예언서를 읽으면서 느끼는 묘한 감정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은 냉혹한 하나님을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하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독단과 독선을 일삼는 오늘날 기독교인을 독교인이라 부르며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10년 넘게 성경을 붙잡고 씨름하는 종교학도로서 그러한 주장에 대해 제가 한마디 한다면 그들은 그 누구보다 근본주의적 혹은 문자주의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통해 쓰인 책을 하나의 완벽한 책으로 규정한 후 그 속에서 돋보이는,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상식과 일치하는 않는, 상황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비판하고 있습니다. 전 객관성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 하고 제게 물으시면 전 단호하게 대답할 겁니다. “아니요. 절대로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성경을 19세 미만은 읽을 수 없는 금지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서명 촉구 글을 읽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건 도대체 무엇이 이들이 이렇게도 한국 기독교를 미워하게 만들었을까란 질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 촉구 글을 읽고 서명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 남긴 댓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 쳐 믿은 거 한심스럽다,” “기독교인은 다 죽어야 한다,” “우후죽순처럼 밤하늘을 뒤덮은 빨간 십자가가 너무 사람의 본성을 해치는 거 같아요,” “청춘을 돌려다오,” “먹사들, 없어져야 할 집단들. 진절머리 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사악한 논리,” “악을 논하거나, 진화론, 창조론 논하거나, 동성애 차별 좀 하지 말라고 하면, 꼭 나에게 사탄이라고 하더라. 대마왕이 될 지경이에요!” “나라를 좀 처먹고 가정을 파괴하며 자신의 과오를 성경으로 합리화시키는 지구의 무좀균 같은 놈들!”

         

          지금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 안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뜨끔하셔야 합니다. 민심이 천심이다는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 민족, 특별히 제사장이 회중을 이끌어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합니다. “허위와 가식으로 무장한 너희의 겉멋 가득한 예배에 진저리난다. 지겹다. 짜증 난다. 이제 그런 예배 그만 좀 해라.” 제가 좀 이상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수하게 달린 댓글에는 각 사람이 경험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날카롭게 서려 있었습니다


          제게 이사야서가 따분하고 재미없는 책으로 다가온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은 복만 주시는 분이란 생각에 중독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건강해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게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는 건데, 삶의 좋은 면과 밝은 면만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전 결국 제가 느낀 삶의 모순을 다른 이 때문에 생긴 거라고 말없이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민족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닌 마음의 개념인데,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 삶에서 삶과 씨름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인데, 그걸 잊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이사야 40:21~25)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벗어나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문제를 없애버리는데 급급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해결은 사실 그 문제를 우리 앞에서 보이지 않는 어디론가 치워 버리는 일일 뿐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면 다시 똑같은 문제가 상황만 바뀐 채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걸 다른 곳에 치워버리고. 그런 후에 그 문제는 모양새만 바꾼 채 다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찾아온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해결이란 변명 아래 도망가기에 급급할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옛날, 하긴 뭐 그리 오래전은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혈기왕성했던 청년 시절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갈매기의 꿈)이란 소설을 읽었습니다. 평범한 삶을 거부했던 조나단. 갈매기로 태어났으면 다른 갈매기처럼 그저 그렇게 살다가 삶을 마감하면 된다는 주변 어른의 말에 순응하지 않았던 조나단은 새로운 날갯짓을 꿈꾸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이사야서 40 31절을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시선으로 읽고 싶습니다. 거듭해서 찾아오는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급하게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새로운 날갯짓을 배우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날갯짓은 하나님을 강경하게 믿었더니 독수리의 날갯짓 같은 강인함이 자고 일어나니 생기는 기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자포자기 상태로 바뀐 그 때. 그 순간을 종말이 아닌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만이 배울 수 있는 날갯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날갯짓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날갯짓이 아닙니다. 이 날갯짓은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는 날갯짓입니다. 이번 한 주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 참된 날갯짓을 연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참살이를 위해 필요한 날갯짓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루하루 살아지는 대로 살다 보니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 또한 잊어버렸습니다. 늦었지만 다시 또다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불어 넣어주신 날갯짓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힘과 용기를, 지혜와 인내를 북돋아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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