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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0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7. 1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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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8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정의는 정의내리기 나름


       한국에는 장마가 찾아와 끝없이 비를 뿌리고 있습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한국 속담이 생각납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결국 이 지구를 천국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우리는 믿었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난주 부산에 사는 작은 누나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나누는데, 울산에서 발생한 지진의 여파를 부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을 직접 들었습니다. 제 누님은 조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집 전체가 흔들거렸다는 거죠. 하루빨리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는 중국은 어마어마한 자연 자원을 주원료로 사용하여 늦게 시작한 달리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은 매년 봄마다 미세 먼지로 고역을 치렀는데, 이제는 매년 봄이 연중무휴로 변했다고 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만들면 되고 그게 잘 작동하지 않으면 고치면 되고 고쳐도 제대로 잘 작동하지 않으면 버리고 새 걸 사면된다는 우리의 생각에 하루빨리 제동장치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편리함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 줄 거라고 믿었는데, 막상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보니 점점 더 불안한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총기소유에 대한 규제 법규 변경 문제로 한껏 뜨거웠던 미국 사회가 대통령 선거로 눈길을 돌렸는데, 지난주에 다시 비극적인 총기 사건이 연속으로 발생했습니다. 업무집행 중 경찰관이 두 명의 흑인에게 총을 쏘았고 한 사람은 댈러스 사건 현장에서 다른 한 사람은 미네소타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군인 출신의 한 흑인 젊은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할 대 배운 전투 수행 작전술을 사용하여 경찰관에게 총을 쏘아 다섯 명을 죽이고 여섯 명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경찰관은 업무 집행 중 신변의 위험을 느껴 총기를 사용했을 겁니다. 그 총기에 의해 죽은 사람을 보고 분노한 그 젊은이는 이런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참된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총을 들었고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친 후 자신 또한 죽었습니다.


미국 헌법에 명시된 자유와 평등, 행복추구는 미국을 대표하는 문구입니다. 유명한 정치가와 교육가의 명연설을 찾아 들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이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강조와 열정은 보기에 좋고 전염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강조한다는 건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드러냅니다. , 미국을 대표하는 자유와 평등, 행복추구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강조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이 세 가지를 현실화시키기가 어렵다는 걸 뜻합니다.


정의(正義)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혹은 바른 의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관계를 꿈꿉니다. 하지만 꿈만 꾸지 실천을 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정의를 실천한다는 건 보통 죽음을 전제로 해야만 할 거 같은 괜한 불안감이 우리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괜한 불안감은 진짜 불안감이 됩니다. 일제의 억압의 잘못됨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노력했던 안중근 의사는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연합해야 함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노력했던 김구 선생도 암살되어 기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지난 두 주간 이 세상에서 정의가 과연 가능할까란 화두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려니 막막했습니다. 함께 읽고 있는 성경은 아가서.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자연에 빗대어 표현한 글이죠. 아무리 집중을 해서 아가서를 읽어도 정의에 대한 구절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제공한 성서 일과를 찾아 이번 주일 예배를 위한 몇 가지 성경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시편 82편을 읽었는데,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누군가는 주일 설교 본문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말씀을 주시옵소서!”라고 외친 후 성경책을 접었다가 느낌이 오는 곳을 찾아 어느 한 곳을 펼친 후 처음 들어오는 말씀을 그 주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전 그런 거 안 믿는데, 이번 경우가 꼭 그랬습니다.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시편 82)


이 구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뜻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신이란 단어는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다양한 욕망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로잡은 다양한 욕망 너머에 존재하는 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잘 돕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건네는 도움이란 행위 속에 엮여 있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머릿속에서 꺼내 다른 곳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잡다한 우리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시편 82년 기자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다양한 인간관계와 그 속에 얽혀 있는 수많은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삶의 근본인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린다고.


       이 주 전 드류 대학교 수영장에서 한국 학생 가족 중 열네 명이 수영장 담당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작년 여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전 옆에서 부당한 대우를 목격했기에 이를 학교 당국에 알렸고 이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가운데 수영장 담당자는 학교 당국과 저에게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 후 얼마 못 가 수영장 담당자가 바뀌었습니다. 여름이 다가올 무렵 사실 전 슬슬 촉각이 곤두서긴 했습니다. 같은 일이 또 발생해서는 안 될 텐데 하는 염려가 있었죠. 그런데 또 비슷한 일은 일어났고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전도사님과 목사님의 사모님들은 수영장 담당자의 위압적이고 차별적인 대우에 이렇다저렇다 할 항변도 하지 못한 채 적잖은 불쾌감을 마음속으로 삭여야만 했습니다.

      

       이건 아닌데.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는 건 한국 사람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는 말인데. 고민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사실 저 또한 그 수영장 담당자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여러 번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전해 듣자 그 상황이 어떠했을지를 분명하게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를 학교 당국에 알렸습니다. 국제학생 가족에 대한 전이해가 필요하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실내 운동장은 수영장 안전수칙을 그 문제가 발생한 지 며칠 안에 수정했고, 그 후 한국 학생 가족이 안전수칙을 어겼었기 때문에 수영장 담당자는 수영장 이용자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강경하게 대처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수영장 담당자는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드류 대학교 학생 생활 관장이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저에게 물어왔고 전 그분과 전화로 수영장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그분과 전 수영장 담당자와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정오에 생활 관장실에서 전 수영장 담당자와 그의 상관인 체육관 부관리자를 만나 그 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대화가 끝날 무렵 생활 관장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그동안 마음에 쌓였던 게 좀 풀렸나요? 괜찮아졌나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전 수영장 담당자가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해 사과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과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 맘에 상처를 남기는 건데, 그래도 이젠 괜찮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직접 들었고 일정 부분은 그를 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그 상처는 저 혼자서 지고 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의라는 잣대를 사용하면 전 옳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롭기 위해 전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법정으로 가져가 길고 긴 투쟁을 거쳐 영화 같은 승리를 따내야 합니다. 아마 절 지켜본 사람들은 엄청 환호하겠죠. 전 그 날 그 자리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열네 명의 한국 사람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드류 대학교 체육관 일상에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제 행동으로 인해 수영장 안전수칙은 더욱더 강화되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의를 위대한 일이 아니라 틀린 걸 틀렸다고 인정하고 이를 알리는 아주 단순한 일로 생각한다면 전 정의로운 일을 한 게 맞습니다. 적어도 제 행동으로 인해 그 사건의 전후를 함께 한 사람은 내년 여름에 수영장에 찾아온 한국 사람을 이번 여름처럼 부당하게 대하지는 않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법규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이라고 강조하시며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시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마태복음 12:11~12)” 정의(正義).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혹은 바른 의의. 정의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사람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이번 주 미네소타와 댈러스에서 일어난 것보다 더 큰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걸 목격하게 될 겁니다. 이번 한 주 그만 잃어버려 잊어버린 정의를 우리 삶 속에서 찾는 연습을 다시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기도


하나님, 올바른 삶, 바른 뜻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영화 속 정의로운 한 장면. 그런 장면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일상에서의 정의를 외면하는 우리가 되지 않겠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우리가 삶의 밭을 함께 일구는 아내와 남편에게,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그리고 스쳐 지나가다 만나는 많은 사람에게 정의로운 우리가 되겠습니다. 경직되게 힘 들어간 겉만 번드레한 정의가 아니라 내가 소중하듯 다른 사람 또한 소중하다는 걸 인정하고 이 바른 뜻을 삶에서 실천하는 우리가 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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