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10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회개는 ‘기억’이다
요즘 날씨가 참 무덥지요?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란 노래 생각나시죠? 이렇게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워싱턴 시내 곳곳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간 때가. 아이들이 아직 어려 함께 갈 수 없어서 가면 안 되겠구나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이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꿰뚫어 본 처는 저 혼자라도 다녀오라며 제게 귀한 자유 시간을 주었습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이리저리 처 눈치를 살핀 후 가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린 후 전 박물관에 들어갔습니다.
입구부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안내대로 가서 박물관 설명서를 집어 든 후 관람을 어떻게 하는지를 확인했고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습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원이 숫자가 적힌 조그만 책자를 하나씩 나누어주며 전시물을 관람하면서 지켜야 할 사항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 층에서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짧은 시간에 설명해야 했기에 많은 걸 말할 수는 없었지요. 그런데 그 안내원의 한 마디가 제 마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목적은 ‘기억’입니다.”
제 두 아들이 중학생쯤 되어 홀로코스트에 대해 공부를 하면 꼭 한 번 데리고 가고 싶은 박물관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어떻게 유럽 전역에 있는 유대인을 학살하려고 했는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받은 숫자가 기록된 수첩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나치 정권은 유대인을 사로잡아 수용소에 집어넣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식별표를 주었습니다. 그 식별표가 바로 숫자였습니다. 철수도 영희도 수용소에 들어가면 인간이 아닌 숫자로 변신합니다.
왕따 현상의 시작도 이와 같습니다. 이름이 아닌 별명, 그것도 인격을 모독하는 별명을 붙여 한 사람을 부리는 순간 그 사람은 더는 사람이 아닌 별명이 뜻하는 물건으로 변합니다. 천문학적인 돈을 사용하지 않고는 이런 박물관은 지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살아남은 유대인이 돈을 모아서 지었겠죠. 이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만 그 박물관을 짓지 않았습니다. 지구에 사는 온 인류를 위해서 그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식과 허위로 가득한 예배를 더는 받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분노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1:11~13)”
이 구절을 우리 시대의 말로 옮기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예배는 ‘속’이 빈 예배, 겉과 속이 다른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이 빈 예배란 화려함이 진솔함을 가린 예배고, 겉과 속이 다른 예배란 겉으로는 성스럽지만 속은 전혀 성스럽지 않은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종교인들이 행한 잘못이나 오늘 우리 시대에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에게 욕을 먹는 이유가 비슷하다는 사실은 약간은 위안이 되지만 동시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변한다는 그 진실이 얼마나 현실이 되기가 어려운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께서 직접 움직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죠.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치는 방법은 삶의 ‘자연스러움’에 제동장치를 가하기입니다. 이사야 5장에는 이를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실지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포도원을 지키는 울타리가 사라지고 담이 허물어집니다. 포도가지를 잘랐더니 찔레와 가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기나긴 가뭄이 시작합니다. 새로운 씨앗을 땅에 심을지라도 더는 새로운 생명이 땅을 가르고 하늘로 자라지 않습니다. 삶을 꾸려나가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때가 많죠? 그럴 때 우리가 종종 읊조리는 말이 있죠?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 삶의 자연스러움이 깨져버린 상황을 표현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아니 우리 자신에게 이런 끔찍한 고통을 안기시는 걸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생각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사야 1:16~17)”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앞이 아닌 뒷부분입니다. 착하게 살아야지. 착해지자. 그런데. 그게 그리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한 부흥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사탄은 우리를 찾아와 넘어뜨린다는 어린 시절 제 고향 교회 목사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무작정 착하게만 살려고 노력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건 착하지 않았던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씻긴 후 그동안 해왔던 악한 행실을 버리는 게 아닐까요? 무슨 말이냐면 가끔 우린 너무 쉽게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잊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뜨거움으로 가득한 찬양집회와 부흥회가 용기와 힘을 우리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는 건 사실이지만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다면 그건 용기와 힘을 얻기 전 그 순간까지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아프고 안타깝고 도망가고 쉽지만 차분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입니다. 우리 몸에 난 상처는 아무리 작을지라도 아물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작은 상처는 적은 시간을 큰 상처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죠. 회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게 아니라 도망가고 싶은 과거를 생생하게 다시 한 번 ‘기억하기’입니다. 새로움이 필요하다면 오래된 과거를 차분하고 진지하게 곱씹는 한 주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할 수 있다는 할 수 없었다는 처절한 자각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회개는 돌아섬이지만 돌아서기 위해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할 게 있다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뒷모습을 보게 하려고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멈추게 한 하나님,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우리가 잠시나마 숨을 고르며 우리 각자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인정하기 싫은 우리의 실수를, 우리의 착각을, 우리의 오해를, 우리의 오만을, 우리의 편견을, 우리의 아집과 고집을, 지금 이 시간 따뜻하게 바라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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