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가 보고 싶은 걸 못 골라요? 어제도 아빠가 보고 싶은 걸 봤잖아요!" 두 눈에 눈물이 맺힌 미누가 절규 직전에 이른 채 엄마 책상 의자에 매달려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부터 저 녀석은 오늘 잘 때까지 투덜거릴텐데. 그러니,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좋은데."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가 처에게 말했다.
"영화는 아빠가 고르는 거니까, 보기 싫으면 보지 말아." 당황이 그늘이 순식간에 깃든 처는 미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다 자라고 나면 보고 싶은 영화만 골라서 볼 수 있을 거예요. 가족끼리 함께 보는 영화는 아빠가 결정합니다."
잠시 후 내가 밥 먹는 자리를 옆에서 지켜주던 처는 자기 책상으로 가서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은 난 영화를 한 편 선택하여 틀었다. 오늘은 모두가 불평불만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내 마음을 심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상영 버튼을 누른 영화가 2019년에 나온 <토고Togo>였다. 1925년 겨울 알래스카 주 네나나Nenana라는 마을에 살던 모든 아이의 생명을 위협했던 급성 전염병 디프테리아diphtheria를 낫게 할 수 있는 면역 혈청 serum을 구하기 위해 기차가 들어올 수 있는 마을인 놈Nome까지 총 거리 1,085 km(674 miles)를 개썰매를 타고 오가야 했던 1925년 디프테리아 면역 혈청 구하러 놈까지 달리기The 1925 Sreum Run to Nome 사건을 영상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캘리포니아에 금을 캐러 노르웨이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온 레온하드 세팔라Leonhard Seppala는 인생의 파도에 떠밀리며 금광을 찾아 알래스카로 갔다. 탄광소 소속 개썰매를 몰면서 살던 레온하드는 부업으로 썰매용 개를 키워서 파는 일도 했다. 1913년 어느 날 태어나는 순간 죽을상 싶은 강아지가 한 마리 태어났다. 자연의 냉혹함을 자연스레 체험하며 살아온 레온하드는 한 마리 강아지의 죽음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아내 콘스탄스Constance는 그렇지가 않았다. 사경을 헤매는 강아지를 안방 침대에 눕혀서 간호했다. 죽을 거라 생각했던 강아지는 살아나 다른 강아지와 더불어 무럭무럭 자랐지만 다 자랐을 때도 22 kg (48 pound)에 불과했고, 시베리안 허스키Siberian Husky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리만치 검은색과 흰색, 회색 털이 뒤섞여 볼품도 없는 개였다. 레온하드는 그 개가 싫어 이름도 붙여주지 않았다. 그 개만큼은 썰매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아는 이에게 선물로 줘버렸지만 이름도 없는 그 개는 새 주인집 유리창을 깨고 자기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름도 없는 그 개는 기회만 주어지면 썰매를 끌고 싶어 했다. 한 날 큰 마음을 먹고 이름 없는 그 개를 레온하드는 썰매견 제일 마지막 자리에 매달았다. 이게 얼마나 힘든지를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썰매 곁에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레온하드는 여러 번 썰매를 멈춰 세웠다. 이름도 없는 그 개가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썰매를 잘 끌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썰매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콘스탄스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웃음꽃이 만발했다. 남편의 썰매를 제일 앞자리에서 끌고 오는 개는 남편이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던 그 개였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드는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던 그 개에게 일본 해군 제독 토고 하이하치로Togo Heihachiro의 이름을 따서 토고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무시했지만 알고보니 놀라운 개였음을 이름 속에 담았다.
1925년 겨울 알래스카 네나나 마을에 디프테리아가 퍼져 마을 모든 아이의 생명이 위험했다. 디프테리아로부터 마을 아이를 낫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놈Nome이라는 마을로 가서 시카고에서 배달된 면역 혈청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눈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 날씨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이동수단은 개썰매뿐이다.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던 레온하드는 면역 혈청을 구하기 위해 놈까지 다녀올 채비를 시작한다. 구글 지도에서 검색하면 네나니로부터 놈까지 직선거리가 777 km (482 miles)라고 나온다. 왕복으로 계산하면 1,554 km가 된다. 직선거리를 계산했을 때. 그런데, 공식 기록에 따르면 토고와 함께 100마리 이상되는 개가 네나니에서 놈까지 왕복으로 달린 거리는 1,085 km다. 대체 어떻게 구글 지도의 최단 거리 계산보다 더 짧은 거리를 달릴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레온하드가 지휘했고 토고가 이끄는 개썰매는 불가능한 모험을 감행했다. 영하 34도의 혹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감안할 때 체감 온도는 영하 65도였던 극한의 추위를 참아내며 노톤 사운드Norton Sound라는 얼어붙은 해협을 두 번 건넜고 해발 1,500m인 '작은' 맥킨리 산Little McKinley Mountain을 두 번 넘었다. 목숨을 건 달리기를 통해 사흘 만에 구한 혈청은 네나니 마을 아이를 살려냈다. 마을 신문 기자는 면역 혈청을 마을로 배달한 개썰매의 지휘견 발토Balto를 신문에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면역 혈청을 구하는 목숨을 건 달리기에서 일등공신은 발토가 아니라 레온하드가 지극히 미워했다가 극진히 사랑하게 된 토고라는 사실을. 발토가 돌아오는 길에 지칠 대로 지쳐 더는 달리지 못하는 토고가 끌던 썰매에 실린 혈청을 받아서 네나니로 돌아오기까지 달린 거리는 51 km였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모험에서 토고가 달린 거리는 480km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타임즈 기자 캐티 스타인메츠Katy Steinmetz는 2016년 7월 25일 자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을을 살리는데 큰 일을 했다고 자주 언급되는 개 발토는 마지막 거리 51km를 달렸을 뿐이다. 총 완주 거리에서 가장 긴 거리를 달린 개는 토고였다. 눈으로 인해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을 뚫고 토고가 달린 거리는 480km였고, 그 거리에는 극심하게 위험한 노톤 사운드 해협 횡단도 포함된다. 그리고 노톤 사운드 해협을 횡단할 때, 토고는 용감하게 부빙 사이를 헤집고 헤엄쳐 앞으로 나가 레온하드와 다른 개도 살렸다. [T]he dog that often gets credit for eventually saving the twon is Balto, but he just happened to run the last, 55-mile leg in the race. The sled dog who did the lion's share of the work was Togo. His journey, fraught with white-out storms, was the longest by 200 miles and included a traverse across perilous Norton Sound - where he saved his team and driver in a courageous swim through ice flore."
"조금 있다가 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데." 혈청을 썰매 짐칸에 실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톤 사운드 해협으로 토고가 들어서는 순간 미누가 말했다.
"아니, 말하지마." 처가 외쳤다.
"Please don't spoil말해서 영화 재미 떨어뜨리지 마!" 지누도 강경하게 말했다.
"헤헤, 조금 있다가 재네들 바다에 빠질건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처가 물었다.
"네! 난 다 알아요. 난 저거 책으로 봤어요."
"무슨 책?" 처가 다시 물었다.
"음... 무슨 바이아그라피biography였는데, 토고 이야기였어요."
"그렇구나. 그럼 한 번 조용히 지켜보자. 언제 바다에 빠지는지." 화면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한 채로 내가 말했다.
영화 속 토고는 바다에 빠지지 않았다.
"에이, 그런 일은 없었네." 영화가 끝난 후 처가 미누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진짜로 재네들 물에 빠져요. 그래서 토고가 앞장서서 수영을 해서 다른 친구들을 살려줘요." 미누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 왜 그럴까? 영화에는 그 장면을 넣기가 힘들었던 게 아닐까?" 내가 말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왜냐면! 바닷속에 들어가면 너무 춥고... 얼음들이 위험하기도 하니까 그 장면은 뺀 거 같아요."
"그래, 미누야. 그럴 수 있겠다." 바다에 빠졌냐 안 빠졌냐로 상호 간에 기분 상하기보다는 평화를 택하기로 마음먹은 내가 대화를 마무리했다.
미누가 읽은 책 내용이 사실이었다. 부빙 사이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개썰매는 바다에 빠졌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번뜩하는 생존 본능에 사로잡혀 자기만을 생각할 때, 토고는 냉정하게 헤엄치며 부빙 사이를 헤집고 나가며 동료를 인도해서 결국 살아서 노톤 사운드 해협을 건넜다. "지누야, 미누야, 너희들도 자라서 어른이 되면 토고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해라. 아빠는 그랬으면 좋겠다." 진심에서 우러난 두 아들을 향한 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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