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화 <1917>을 보려고 했었다. 아니, 봤다. 한 20분을 보다 다른 영화로 바꿔야만 했다. 전장에 널린 시체와 그곳을 열심히 맴도는 쥐떼, 그리고 그곳을 헤쳐 나가려는 앳된 얼굴의 병사 두 명이 바닥으로 미끄러진 후 다시 균형을 잡기 위해 손을 내디딘 곳이 시체 가슴 부위였고 손은 시체 가슴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악! 더이상 못 보겠다." 아내가 외쳤다.
"엄마, 무서워." 미누는 이미 머리를 엄마 가슴속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그래서 <1917> 시청을 중도에 그만 둔 후 선택한 영화가 <조조 래빗Jojo Rabbit>이었다.
나치 열혈 당원 10살 짜리 소년 요하네스 벳즐러Johannes 'Jojo' Betzler가 주인공이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려는 무렵이었다. 히틀러의 개인 경호원이 되는 게 꿈인 요하네스는 나치즘이 극에 달할 때 태어난 아이답게 삶은 히틀러에 대한 충성에서 시작해서 히틀러에 대한 사랑으로 끝난다고 믿는 아이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머리는 독일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마음과 몸은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엄마를 닮아 마음이 따뜻한 요하네스는 나치 유소년 당원 훈련소에서 교관이 용맹함을 증명하기 위해 목을 비틀어 죽이라고 품에 안겨준 토끼를 숲 속에 다시 풀어주고 빨리 도망가라고 다그쳤다. 그로 인해 그는 토끼처럼 겁이 많은 겁쟁이Jojo Rabbit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자신의 용맹함과 강인함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조조. 그렇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는 자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상과 현실이란 어마어마한 공백을 조조는 상상 친구imaginary friend를 채워나갔다. 혼자 있을 때마다 자기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히틀러.' 상상 속에서 만나는 히틀러는 조조의 용맹함과 강인함을 알고 있다. 그런 그의 상상 놀이가 도를 넘었을 때, 조조는 훈련소 교관이 손에 들고 시범을 보여주던 수류탄을 빼앗아 적에게 던지는 용맹함을 뽐내려 했고 빈 공간이 아닌 숲 속 나무에 맞은 수류탄은 조조 앞으로 다시 날아왔다. 이로 인해 나치 열혈 당원 조조는 독일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이 되는 걸 포기한 후 집 근처 나치 동사무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일은 나치 선전문구를 벽에 붙이는 일.
나치 정권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관찰한 세상이 군인 사회였던 조조의 동심을 나치 정권은 어떻게 세뇌시켰는지를 재밌게 그려내던 영화는 조조가 자신의 집 이층 벽에 엘사Elas Korr라는 이름의 유대인 청소년이 숨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엘사는 얼마 전에 유행성 독감Influenza으로 죽은 누나 인게Inge의 친구였다. 유대인은 인간이 악마라고 배웠는데 태어나 처음 만나 유대인 엘사는 너무 예뻤다. 사춘기에 접어들기에는 아직 이른 얼굴인 조조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독일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대상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리고 엘사를 집에 숨겨준 이가 엄마 로시Rosie라는 사실은 조조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엄마와 인간이 아닌 유대인이 나치 열혈 당원 조조 집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영화는 히틀러 정권의 세뇌 교육으로부터 조조가 어떻게 머릿속에 저장된 잘못된 지식을 서서히 분별하여 버리고 자기 스스로 깨달은 진실과 진리로 채워나가는지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본다. 10살 소년에게는 히틀러보다는 엄마가 더 소중했다. 10살 소년에게는 매의 눈빛으로 호들갑 떨며 고함지르는 일에만 전념하는 히틀러보다는 누나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우주인 같고, 나치 사무실에 신고 전화를 해야 한다는 머릿속 외침을 이유를 알 수 없게 끌려가는 한 연상의 여인에게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치달았고,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독일의 심장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조는 반나치 운동에 가담했던 엄마가 목을 매달린 채 길거리에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를 기준으로 조조는 엘사에게 점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시작했고, 다가갈수록 유대인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새롭게 고쳐나가야 했다.
며칠 후 조조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목격했다. 연합군이 조조가 사는 마을까지 쳐들어와 동사무소 지붕에 꽂힌 나치 깃발을 성조기로 바꿔 달았다. 길에서 만난 유소년 군인 친구가 히틀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엘사가 생각난 조조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조조, 어떻게 됐어? 끝났어? 누가 이겼어?"
조조의 얼굴은 혼란함과 망설임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독일군이 이겼어. 그러니, 넌 계속 거기서 살아야 해. 걱정마. 내가 널 도와줄테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조조는 엘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두려움이 가득한 엘사의 눈이 오랜만에 접한 바깥세상은 평화로웠다. 주변을 둘러보던 엘사는 성조기를 발견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챈 엘사는 문 앞에 서있던 조조에게 다가가 오른손으로 조조의 뺨을 찰싹 때렸다.
"맞을만했지." 조조가 말했다. 씁쓸하면서도 체념이 섞인 웃음을 오른쪽 입술 가장자리에 담은 채로.
"그래, 이젠 어쩔 거지?" 조조가 물었다.
엘사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조도 엘사를 따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둘은 몸으로, 춤으로, 성장과 사랑, 믿음과 희망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어린이의 동심에서 직시한 삶의 부조리. 전쟁이란 모든 의미를 무의미로 만드는 무. 상상과 환상은 조조를 현실로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 엘사와의 만남, 엘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엄마의 사랑. 모든 걸 잃었지만 두 아이는 춤을 췄다. 자기를 드러냈고, 표현했다.
"아빠, 조조 래빗 2는 없어요? 나왔을 거 같은데..." 미누가 말했다.
"조조 래빗 2가 나왔을 거 같애?" 내가 되물었다.
"네, 이거 언제 나온 거예요?" 미누가 다시 물었다.
"이거 2019년에 나왔지. 너 이것도 자막 끝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거 같애?" 미국 마블Marvels 영화를 사랑하는 미누는 항상 마블 영화에서 자막 끝에 다음 영화를 소개하는 짤막한 영상을 기다렸다 보는 걸 참 좋아한다.
"네, 있을 거 같아요."
"조조 래빗은 이걸로 끝이네. 끝. 자, 이제 자자!"
"아니에요. 조금 앞으로 가보세요."
"없다니까! 자, 다시 봐봐. 여기서 여기까지. 자, 없지?"
"어, 진짜... 없네."
"자, 지누, 미누, 이제 양치질을 합니다. 알겠죠?"
"네에에..."
지누랑 미누가 사이좋게 화장실로 걸어가는 걸 본 후 난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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