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창세기 18:1-15
전 아들이 둘 있습니다. 2007년에 태어난 첫째 아들 지누와 4년 후인 2011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 미누, 이렇게 두 아들과 함께 티격태격하며 살아갑니다. 2020년이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오후. 여느 때처럼 전 오후 3시 13분에 미누가 다니는 초등학교 출입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열어주는 문을 열고 학교 밖으로 나왔을 때 제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으면 망설임 없이 선생님에게 “우리 아빠가 저기 있어요!”라고 말하며 손바닥 마주치기 인사 후 제게로 다가와 씩 웃어주는 모습이 예뻐서, 전 가능하면 몇 분 일찍 도착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날 미누는 제게 웃음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문밖으로 나와서 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확인하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후 제게로 걸어왔지만, 눈은 한 친구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3년 간 같은 반에서 생활한, 작년까지만 해도 가장 친한 친구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외치던 제임스라는 이름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임스는 가방을 자신의 엄마에게 건네준 후 미식축구공을 가슴에 품고 다른 한 친구와 함께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미누와 마주치긴 했지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미누야, 안녕!”이라 말하며 사라졌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가 미누에게 말했습니다. “미누야, 작년까지만 해도 제임스가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갑자기 그런 거 같지가 않아서 이상하지?” “네, 진짜 이상해요.” 미누가 대답했습니다. “미누야, 너 그거 아니?” “뭐요?”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친구와 미국 사람이 생각하는 친구가 다르다는 거?” “무슨 말이에요?” “한국 사람은 5000년 이상을 한반도라는 한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은 채로 살아왔거든. 그래서 한 번 친구는 평생 친구였단다. 한 번 만나서 친구가 된 사람은 언젠가는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한국 사람은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 미국 사람은 조금 달라. 미국이란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래 태어난 나라를 떠나야만 하잖아. 엄마랑 아빠가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 미국에서 살 수 있는거처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미국이란 나라는 한국보다 50배 이상 크잖아. 현재 우리는 미국 뉴저지란 주에서 살지. 하지만, 너도 봐서 알겠지만, 드류에서 함께 공부했던 목사님, 전도사님은 공부를 마치면 다들 어디론가 떠나잖아. 그치? 뉴저지에서 살 수도 있지만, 뉴욕으로 갈 수도 있고, 보스턴으로 가기고 하고, 로스앤젤레스로도 가고. 한국으로도 돌아가고, 아니면 캐나다로도 가잖아. 그런데 너무 멀리 가잖아.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그래서 미국 사람에게 친구는 함께 있을 때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경우가 흔하단다.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지. 미누가 생각하는 친구와 제임스가 생각하는 친구의 차이점을 미누가 잘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제임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래서 그랬구나. 참 이상했어요.” 잠시 후 미누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빠, 나도 괜찮아요. 지금 내 반에 제임스는 없지만 새로 만든 친구들이 많아요.”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18장은 교회에서 만남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성경 이야기입니다. 인생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 우리 운명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가 이 이야기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차분하게 곱씹다 보면 한 가지 탐탁지 못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남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건 좋은데 이 만남은 갑과 을의 관계인 경우가 흔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만남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갑’이 아닌 ‘을’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란 제목의 방송을 아시나요? 유명한 과학자에서부터 연예인, 어느 골목 가게 사장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서 주변에 영향력을 미치며 사는 사람을 초대하여 15분간 마음속에 간직해온 삶의 가치관에 관해 듣는 방송입니다. 유튜브 검색란에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라고 입력하면 지금까지 이어온 강연자료를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심하실 때, 한 번씩 찾아서 시청하시면 삶에 적잖은 보탬이 됩니다.
언젠가 한 회사의 사장이 훌륭한 인재상에 관해 강연하는 걸 봤습니다. 신입사원을 뽑는 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최종 면접자를 모두 다 만났지만 마땅한 인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결국에 가서는 신입사원을 한 명 채용했습니다. 이유는 조금 영화 같았죠. 면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지원자가 회사 건물 바닥에 떨어진 휴짓조각을 집어서 쓰레기통에 넣었는데, 그 장면이 회사 안전 카메라에 잡혔고 이를 알게 된 면접관이 그 지원자를 신입사원으로 채용한 거죠. 그 휴짓조각은 그날 아침부터 그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수십 명의 지원자가 면접을 보기 위해 회사 건물로 들어왔고 몇 시간 후 건물 밖으로 나갔지만,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짓조각을 보지 못했거나 봤을지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강연을 시청한 날로부터 전 새로운 습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보는 즉시 줍기로 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제가 휴지 줍는 걸 누군가는 봐야 하는데, 수년간 계속 줍긴 하는데 아직 그걸 봐주는 사람은 없는 거 같다는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쓰레기를 줍는 저는 철저하게 ‘을’입니다. ‘갑’에 해당하는 누군가가 절 지켜봐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하나님이 아브람의 마음속에 남긴 한마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1-2)” 어디로 가야 할지도 정확하게 몰랐지만, 아브람은 지금까지 한 곳에서 정착민으로 살아온 삶을 뒤로하고 여기저기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는 유목민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유목민은 이방인을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동시에 간직한 채 대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다 마주치는 낯선 이는 일단 적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주변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 누군가를 잘못 만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이들에 대한 소식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유목민의 삶은 매 순간이 위기의 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위기의식 때문에 유목민은 일단 적으로 간주해야만 하는 낯선 이를 도리어 아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전통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낯선 이를 만나게 되면 생사를 건 싸움을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극진하게 대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모순성에 기반한 유목민이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창세기 18장을 읽게 되면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행 중 마므레라는 지역의 한 상수리나무 아래에 장막을 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날이 아주 뜨거울 때라고 했으니까 태양이 중천에 걸렸을 때였겠죠. 사막 지역을 여행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사막 지역에서 태양이 작열할 때면 그늘로 몸을 숨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세 명의 이방인이 자신의 장막을 향해 걸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창18:2)”는 구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늘에 앉아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유목민이 장막을 치고 한곳에 정착하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해야 할 일은 안전을 위해 주변을 살피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에 소홀했고, 갑자기 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람 셋에 깜짝 놀랐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지고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라. (창18:3-5)” 아브라함은 한순간에 자기 눈앞에 나타난 세 명의 이방인을 적이 아닌 손님으로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급히 아내 사라에게 다가가 떡을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하인에게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한 마리를 잡아 요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잠시 후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나무 그늘에 상을 차렸고 세 명의 낯선 이가 먹는 걸 지켜보며 서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제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이 말을 들었을 때, 온몸이 오싹했을 겁니다. 아내 이름이 사라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리고 이 말은 낯선 이가 낯선 이에게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낯선 이는 내년 이맘때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더 이상한 말을 합니다. 이 말에 대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반응은 서로 달랐습니다. 사라는 냉소와 경멸, 비웃음으로 반응했지만, 아브라함은 침묵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이의 말이 사실은 낯선 이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임을 깨닫기 위해 침묵했습니다. 알아듣기 힘든 말, 이해하기 힘든 말, 가볍게 옆으로 제쳐두는 게 아니라 곱씹고 또 곱씹어 그 말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헤아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한민국 해군 복무를 마친 후 다시 돌아간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전 여주 삼교리에 있는 여주 삼교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시골에 있는 시골 교회였습니다. 이천 시내에 있는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던 선배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원체 시골에 있는 교회라 서울에서 교회까지 가는 길이 대중교통으로 하룻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천으로 일하러 가는 선배의 차를 얻어 타고 먼저 이천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서 다시 여주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른 선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천과 여주 경계 지역에 위치한 한 감리교회에서 일하는 형이었죠. 그런데 이 형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이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교회에서 일하는 형과는 달리 이 형은 제가 당신의 차를 얻어 탈 때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제가 일하는 여주 삼교 교회 마당까지 저를 데려다줬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예상치 못한 교통체증으로 한 시간 가량을 이천에서 여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출구 앞에서 서 있어야 했는데도 실오라기만큼의 짜증스러움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은 채 절 교회 마당까지 데려다준 후 다시 자신이 일하는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몇 년 전 워싱턴 주에 있는 한 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던 그 형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때 왜 그렇게까지 제게 환대를 베풀어줬는지를 물었습니다. 형님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주셨어.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도와주는 척만 하지 말고 정말로 도와주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야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날 기억해준다고. 아버지 말씀대로, 네가 날 좋게 기억해주길 바랐고 그래서 그렇게 했던 거 같아. 네 기억에서 살아남으려는 나, 이기적이다, 그치?”
나이가 든다는 건 삶의 한계를 자각해야만 하는 기회가 점차 늘어나는 순간을 피해갈 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다른 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를 먼저 계산한 후 우리는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은 가까운 관계 목록에서 제외합니다. 이용 가치가 높은 사람은 특별 관리 대상으로 등록하여 다양한 사회관계망을 활용하여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합니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이방인이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었을지라도 똑같이 정중하게 대접해서 떠나보냈을 겁니다.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나 낯선 세상을 끝없이 여행하는 삶을 시작한 순간부터 삶은 외롭다는 걸,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걸, 의지할 수 있는 이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난 선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가르침에 충실했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들은 바를 성실하게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제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천 시내 교회에서 일했던 선배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삼교교회 마당까지 한결같이 절 데려다줬던 형에 대한 제 고마움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사그라들지가 않습니다.
2020년. 어느덧 첫째 달이 기억 속으로 다시 사라져갑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은 기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행복한 순간과 불행한 순간은 어김없이 누군가와의 만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창세기 18장을 함께 묵상한 연합교회 성도님들이 2020년을, 소중하고 뜻깊고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으로 오밀조밀 채워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닙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브라함의 꿈이 이루어져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하나님은 거듭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생길에서 마주치는 이방인을 따뜻하게 잘 대접하며 살아라. 너희도 한때는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헤매며 살아야 했던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라.
닫는 기도
하나님, 오늘 이 아침에 창세기 18장을 묵상하며 ‘만남’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서만 살 수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들어주는 게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가 이루어온 다른 이와의 관계임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각하며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이용 가치에 따라 계산하여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사람은, 그 사람 그 자체가, 우리만큼 존중받고 인정받아야 할 대상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누군가의 주머니에 가득 담긴 돈 때문에, 누군가의 목에 잔뜩 걸린 사회적 지위 때문에, 누군가가 손에 움켜쥔 사회적 힘 때문에, 진솔한 관계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채 살지 않겠습니다. 매일매일 만나는 사람들, 조금은 지겹고 따분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방문을 발견하고, 매일매일 이방인과의 스쳐 지나감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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