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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변해가는 걸음걸이 (창35:23-36:8)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20. 2. 2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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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23-36:8

"이삭은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창35:29)"

 

1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35장 23절에서 36장 8절까지에는 야곱의 후손과 에서의 후손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야곱의 후손과 에서의 후손을 구별해 주는 표시가 쌍둥이 형제의 아버지 이삭의 죽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녀에게 하나님에 관해 가르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문구입니다. 조금 쉽게 풀어본다면, “아브라함이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 이삭이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 야곱이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게 태어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와중에 만난 하나님은 똑같을 수가 없지요. 어떤 이의 하나님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가깝고, 어떤 이의 하나님은 엄한 아버지, 어떤 이의 하나님은 친한 친구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삶, 이삭의 삶, 야곱의 삶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건 잘 알겠는데, 왜 하나님에 관해 설명할 때 “이삭의 하나님”이란 문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할까요? 이게 궁금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과 비교할 때, 이삭의 삶은 단 한 번 아버지가 그를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순간을 제외하면 그리 큰 우여곡절이 없는 제법 순탄한 삶이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29절은 이삭의 마지막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2

이 구절을 읽는데, 문득 야곱은 어떤 모습으로 아버지 이삭의 임종을 지켜보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땅에 묻었을까가 궁금해졌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여 하나님이 형 에서에게 허락한 장자권, 첫째 아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을 훔쳤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였다는 말속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도 속이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생명 원칙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황급히 집을 떠났습니다. 형이 무서워 도망쳤습니다. 들판을 누비는 사냥꾼으로 자라난 형 에서와는 달리 야곱은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집안에서만 보냈기 때문에 바깥일에 서툴렀습니다. 광야를 안전하게 여행하는 법조차 알지 못했기에 그는 집을 나선 첫날밤을 홀로 광야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사막 기후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낮과 밤의 기온차가 아주 크다는 점입니다. 밤사이 무슨 일이 자신에게 닥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야곱은 쉽게 잠들 수 없었을 겁니다. 광야를 벗어나야 했지만, 밤은 갈수록 어두워졌고 결국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야곱은 주춤거리던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주저앉았을 겁니다. 여기가 내 무덤이구나 생각했겠죠? 스스로 자처한 죽음이 소리 없이 엄습(掩襲)해 오는 그 순간에 야곱은 잠들었고, 꿈을 꾸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겹치는 자리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난생처음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하나님의 집’을 뜻하는 베델Bethel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3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형 에서에게 복을 훔친 야곱.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훔친 야곱. 하나님을 거부했던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자신이 복을 훔친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걸 뜻했습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야곱의 발걸음은 집을 떠나왔을 때부터 갑절은 더 무거웠을 겁니다. 지팡이 하나만 들고 건넜던 얍복 나루Jabbok Ford에 이른 야곱은 자신의 모든 가족과 가축이 먼저 나루를 건너가게 했습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는 내일이란 시간, 곧 미래로 떠나보냈지만 자신은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미래로 나가고 싶었지만 자기가 과거에 지은 잘못이, 아직도 풀지 못했던 복을 향한 갈망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가정도 꾸렸고, 재산도 모았는데, 복에 대한 갈망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복스러운 삶을 꾸렸는데, 삶은 이전보다 더 허망했습니다. 밤새 갈등과 번뇌로 이리저리 뒤척거렸고, 바로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무작정 자기에게 달려왔습니다. 아침해가 뜰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밖에서 찾을 수 있는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복을 찾아 형과 아버지를 속였고, 복을 찾아 800킬로미터 떨어진 외삼촌 집으로 떠났지만, 그 어디서도 마음의 갈급함을 채워주는 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참된 복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날 밤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샘솟은 이 깨달음은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까지 끝없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며 살았던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만드셨습니다. 남은 인생은 마음으로 걸어가라고. 지금부터는 마음속으로 걸어가라고. 오늘부터는 인생길을 마음 다해서 걸어가라고,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리셨습니다.

 

4

다음날 아침 야곱은 자신이 밤새 하나님과 씨름했던 얍복 나루를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브니엘Peniel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얍복 나루’에서 ‘얍복’은 ‘자기 비움empty itself’을 뜻합니다. 복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젊은이 야곱은 사닥다리 꼭대기에 서 계신 하나님을 먼발치에서 우러러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야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자기를 버렸을 때,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 야곱은 얍복 강가를 건넜습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하늘의 복은 세상의 복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우리에게 알려주듯 쩔뚝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쩔뚝거림으로 일곱 번 바닥에 절을 하며 형 에서에게 다가간 야곱이 고백했습니다. “제게는 형님의 얼굴이 하나님 얼굴처럼 보입니다. (창33:10)”

 

5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곱의 신앙 여정은 이렇게 끝납니다. 하지만, 야곱의 신앙 여정은 형 에서를 만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형 에서를 먼저 보낸 야곱은 형이 사는 세일Seir로 가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돌려 숙곳Succoth으로 가 그곳에서 잠시 여독(旅毒)을 푼 후 다시 가나안 땅 세겜으로 갔고 그곳에서 땅을 구입해 정착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그곳에서도 야곱은 마음 편히 머물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아내 레아가 낳은 딸 디나가 그 지역 히위 족속 추장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에 화가 난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는 추장 세겜이 이끄는 족속의 모든 남자를 살해했습니다. 이로 인해 야곱은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절뚝거리며 또 어디론가를 향해 다시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금 정처 없이 떠돌던 중 사랑했던 아내 라헬은 막내아들 베냐민Benjamin을 낳다가 그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한평생 머물었던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후 형 에서와 함께 아버지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런 후, 에서는 다시 자신의 식구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야곱은 고향 땅에 정착합니다. 

 

6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문구에서 세 번째 신앙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야곱의 삶과 신앙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면서 자기의 끝없는 욕망을 현실화시키는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한 남자의 삶과 신앙을 이스라엘 민족은 왜 지금까지 변함없이 본받아 따르려고 할까요? 전 그 이유를 야곱의 변해가는 걸음걸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쫓아 자기만을 위해 숨 가쁘게 달리며 살았던 야곱의 걸음걸이는 세월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난 후 야곱의 걸음걸이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사실은 모두 다 잘 알고 계시죠? ‘복’이란 단어에 집착하며, 복만을 열망했던 자기 마음속에 갇힌 채 살던 야곱이 마음 밖으로 나오는데 필요했던 시간이 한평생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이 온갖 꾀를 다해 마지막으로 쟁취한 소유물이었던 라헬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베노니Benoni’란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베노니는 “내 슬픔이 응결진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죽자 야곱은 막내아들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을 뜻하는 베냐민Benjamin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상징합니다. 자신이 쟁취한 모든 것을 잃은 순간 야곱은 삶이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였고, 그 깨달음을 이번에는 막내 아들의 생명에 담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야곱은 자신과 무척이나 비슷했던 아버지 이삭이 한평생 어디론가로 이동하지 않은 채 한 자리에 머물렀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자기에게 축복 기도를 해주셨던 아버지, 한평생 자기를 기다렸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이 아침 저와 함께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돌아가기까지의 인생 여정, 신앙 여정을 묵상한 성도님들의 걸음에 야곱의 모습이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잠깐 눈을 감고 함께 묵상한 말씀에 가지고 하니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새기는 기도

하나님, 해가 갈수록 몸이 예전만 못합니다. 예전처럼 민첩하고 활발하게 움직일 수도 없고, 바쁘게 무슨 일을 하고 나면 며칠 동안 몸이 욱신거립니다. 그런 우리 자신이 다른 이와 비교할 때, 자꾸만 뒤처지는 거 같아 답답합니다. 오늘 아침 야곱의 변해가는 걸음걸이를 묵상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예전만 못한 우리 몸의 느려짐을 애써 바꾸려 노력하며 우리 자신에게 화내지 않겠습니다. 그럴 때면 야곱의 절뚝거림을 생각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만을 위해 처절하게 바쁘게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라도 비좁은 우리 마음속에서 걸어 나와 끝을 알 수 없는 세상의 넒음과 높음에 감탄하며 느긋하게 걸아가겠습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서글퍼지면 지금부터는 꼭 해야 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분별해 마음을 듬뿍 담아 해나가겠습니다. 예전같지 않은 시력 때문에 답답해지면 지금부터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더 차분히 더 자세하게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쩔뚝거림이 축복임을 마음속에 새기며 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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