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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순간은 바로 지금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9. 12. 1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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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양자물리학

말씀: 요한계시록 15:1-8

 

제목: 종말終末의 순간旬間은 바로 지금只今

 

     2006년 2월 4일에 전 제 청년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얼굴은 알고 있는 현재 연합교회 유치부 전도사로 일하는 ○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백년가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으로부터 8년 전인 1998년에는 청소년이었던 제 삶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어느 날 제 이름으로 배달된 편지를 확인한 어머니는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친구 또한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내용이 적힌 편지를 받았기에 몇몇 친구와 함께 전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몇 가지 서류에 도장을 찍은 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습니다. 1998년으로부터 12년 전인 1986년에는 사회라는 테두리 밖에서 자유롭게 살던 제 유년 시절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공립 교육기관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자 큐블러-라스Elisabeth Kübler-Ross라는 이름을 들어본 분이 계신가요? 안 계시군요. 그럼 호스피스hospice라는 말은 들어보셨지요? ‘병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문분야로 구성된 팀 접근을 통해 증상을 효과적으로 조절하고, 환자와 가족을 함께 치료하며 평안한 임종을 위한 돌봄을 제공하는 활동 혹은 이 일의 종사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조금 더 쉽게 풀어 본다면, 임박한 죽음과 씨름하는 이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돌보는 기관과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호스피스라고 부릅니다. 호스피스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hospitium’인데요. 이 단어 속에 담긴 뜻은 ‘쉬어갈 평안한 장소’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hospital’, ‘hotel’, ‘motel’, ‘hostel’이 모두 이 라틴어 ‘hospitium’에서 생겼습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의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미국에서 유학 온 한 남자 학생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남편과 함께 의사 면허를 취득한 그녀는 사랑 때문이었겠죠? 고국 스위스에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스위스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살다 삶을 마감했습니다. 미국을 오늘날의 미국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공교롭게도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유럽에 살던 수많은 사람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명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 돈이 있는 사람,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먼저 미국으로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낯선 나라에서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유럽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한 피부가 하얀 미국인이었지만, 낯선 나라에서 의사로서 뿌리를 내리기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발령받은 병원은 대다수 의사가 기피하는 정신병자로 가득한 맨해튼 주립 병원Manhattan State Hospital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정신병자를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규정해서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여 손과 발을 묶은 채 병동에 감금해 두는 걸 치료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손과 발이 묶인 채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직면한 후 극심한 회의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다른 일터를 찾고 싶은 맘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정신병자를 인간이라 믿으며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장기적으로 과도하게 복용하면 뇌 기능만이 아니라 신체기능도 손상하는 각종 약물 투여 양를 줄이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을 안아주고, 말이 없는 그 사람 옆에 말없이 차분하게 앉아 주었습니다. 이런 작은 변화는 시간이 지나자 놀라운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정상적인 사고가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정신병자는 폭력과 강압 대신 차분함과 평안함으로 다가오는 엘리자베스에게 폭력과 저항이 아닌 차분한 눈 마주침으로 응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막다른 길에 이른 사람에게 필요한 건 치료가 아니라 함께함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깨달음과 신념이 정신질환자에게 인간성과 존엄성을 돌려주었던 거죠. 그런 그녀의 독특한 경험과 체험은 호스피스 운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인생 막다른 길에 이른 이에게 필요한 건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한 긍정 어린 시선임을 엘리자베스는 깨달았고, 이 깨달음은 1977년 캘리포니아주 에스콘디도Escondido, California에 세워진 ‘평화의 집Shanti Nilaya’으로 형상화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죽음과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만 하는 나약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심리적 역동을 가까이서 관찰한 엘리자베스는 이 소중한 경험을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감정 상태 변화 이론’으로 집약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습니다: “산다는 건 소중한 걸 계속해서 잃어가는 경험이다. 삶이란 피할 수 없는, 직면해야만 하는 상실 연습장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에덴동산과 비슷한 걸 상실하는 경험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에덴동산과 비슷한 건 바로 엄마 뱃속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으로 떨어진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내뱉는 첫마디는 울음입니다. 이 첫마디를 내뱉지 않으면 의사는 엉덩이를 때려서라도 울게 만들죠.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들을 수 없겠지만, 남겨진 이들이 우리를 향해 내뱉는 첫마디는 다시 울음입니다. 울음 말고는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우리는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어린이가 된다는 건 젖먹던 시기를 상실하는 경험이고, 어른이 된다는 건 유아기를 상실하는 경험이고, 결혼한다는 건 자유로운 청년기를 상실하는 경험이고, 결혼한 남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夫婦는 더는 부부일 수 없고 부모父母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다 자란 아이를 바라볼 때가 되면 이제 우린 아이에게 투영된 우리의 과거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삶이란 시작과 끝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나면, 우리네 인생살이의 시작과 끝은 오래달리기의 출발점과 도착점처럼 직선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시작 속에서는 이미 끝이 담겨 있고, 끝 안에는 이미 또 다른 시작이 숨어 있습니다.

 

     청년으로 자라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은 후 홀로 사막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하늘의 뜻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에 관해서 모르는 분은 이곳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청년 예수님이 사막에서 40일간 수련을 마친 후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서 하신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때로부터 어느새 최소 2019년이 흘렀지만,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고 이곳에 있는 여러분과 제 삶이 끝난 후에도 세상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여전히 꿋꿋하게 잘 굴러갈 겁니다. 물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끝없는 문제로 세상은 시끌벅적할 겁니다. 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선언을 통해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셨던 바는 임박한 세상의 종말과 임박한 죽음이 아니라 살아감이 곧 죽어감이고, 죽어감이 곧 살아감이라는 삶의 모순적 진리를 멀리한 채 감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물건과 물질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이를 향한 사자후獅子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자후와 밧모스Patmos 섬에 유배 중인 사도 요한이 환상 중 목격한 임박한 종말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매일 일어나는 시작과 끝, 상실과 아픔에 대한 선언이란 걸 받아들이면, 한 가지 숙제가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작과 끝이 끝없이 공존하는 오늘을,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2장 17-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살아감이 죽어감이고 죽어감이 살아감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이들, 종말의 순간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임을 깨달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삶을 새롭게 대하며 살아낼 힘을 불어 넣어주신다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 힘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아이는 순수純粹합니다. 순수한 이유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사고의 깊이와 폭이 한계限界되어 있기 때문이고, 바꾸어 말하면 잔머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잔머리의 부재로 인해 아이는 다른 이의 허영과 겉치레, 속임수를 천진난만天眞爛漫한 마음으로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내린 엄마와 아빠를 향한 평가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냉험하게 진단하는 예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이는 환상幻想을 붙잡고 살려는 젊은이를 응원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자기보다 과대한 자기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환상입니다. 환상은 열정이 있을 때만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이죠.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 속에는 실패에 대한 과도한 불안은 숨어있는데, 환상을 좇는 젊은이에게 정신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라고 충고하는 어른의 마음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건 종말終末에 대한 불안不安입니다. 그래서 도전하는 젊은이를 미련하다고 비난하고 현실이 만든 경계 속으로 들어오라고 촉구促求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현실보다는 환상을, 확실성의 세계보다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선호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늙은이는 꿈쟁이가 됩니다. 여기서 꿈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바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꿈은 여러분이 잘 때 꾸는 꿈입니다. 늙어갈수록 잠을 깊이 잘 수 없다고 하는데요. 이와 동시에 꿈을 꾸는 능력도 서서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꿈의 기능에 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현재 가장 많은 동의를 얻는 이론은 뇌세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꿈은 하루 동안 우리가 흡수한 정보 중 깨어있을 때 처리處理하지 못한 걸 온몸이 휴식休息을 취할 때 처리해줍니다. 살아낸 세월에 비례하여 우리 마음에는 수많은 상처가 남습니다. 처리하지 못한 채, 혹은 처리할 힘이 없어서, 마음속 지하실에 던져 놓은 상처를 처리해 주는 게 꿈인데,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이 소중한 꿈을 잃어버립니다. 꿈을 잘 꾸기 위해서는 잘 자야 하는데요. 잘 자기 위해서는 잠이 안 온다고 수면제나 포도주 혹은 소주를 마시면 안 됩니다. 독성 물질은 꿈을 꾸게 하는 깊은 잠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심신의 항상성恒常性을 파괴破壞합니다.

 

     마지막으로 어제와 내일이 오늘 속에 담겨 있다는 걸 깨달은 이는 남종과 여종, 즉,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더 높은 곳만 쳐다보기 때문에 낮은 곳을 바라보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잦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부리는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 종살이로 괴로워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부르짖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은 오늘의 시작입니다. 지금 우리가 빚고 있는 오늘의 시작은 오늘 밤에 마지막에 이릅니다. 이곳에 앉아계신 성도님과 제가 오늘 하루를 하나님의 영에 확실하게 사로잡혀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되찾아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삶을 대하고, 젊은이의 환상을 되찾아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만을 생각하며 무모하게 달려도 보고,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 마음속 상처 하나하나를 어루만지고, 남종과 여종의 말에 귀 기울이며 ‘나만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을 빚어갑시다. 

닫는 기도

하나님, 2019년 12월 13일, 2019년이 마지막을 향해 매섭게 달려가는 이때 오늘도 어김없이 당신께 나와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당신을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며 하루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종말이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회개할 때가 지금이라고 다급하게 말씀하셨는지를 이 아침에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니다. 내일은, 내일모레는, 내년에는, 10년 후에는 더 나은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라는 신기루 좇는 걸 이젠 멈추고 내일이 오늘에서, 내년이 오늘에서, 10년 후가 실은 오늘 이 순간에 담겨 있음을 마음에 새기며 살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삶의 총합인 오늘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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