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1~9
사라는 백이십칠 년을 살고 키럇아르바라고도 하는 헤브론 땅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아브라함은 시신 앞에서 물러나 헷 사람들에게 가서 청하였다. "나는 당신들한테 몸붙여 사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나, 내 아내를 안장하게 무덤으로 쓸 땅을 좀 나누어주십시오."
1
뉴욕 북부 한 시골 마을에 있는 교회 영어권 회중 예배를 인도한 지 이제 다섯 주가 지났습니다. 아직도 전 그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라기보다는 그 교회 영어권 회중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죠. 한 3개월 전 그 목회자 자리에 관해 이야기 나누기 위해 만난 교회 성도님들은 한목소리로 제게 말했습니다. 작년에만 해도 50명 남짓의 영어 회중이 있었다고. 그래서 전 그 50명이 넘던 영어 회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교인에게 물으면서 제 일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분은 50명이 넘던 회중이 갑자기 사라진 걸 한 사람 잘못으로 비난했습니다. 어떤 분은 이 일에 관해 당신의 생각을 밝히는 걸 꺼렸습니다. 또 어떤 분은 가능한 한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분은 일어난 일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그 일을 경험하면서 느낀 당신의 감정에 집중하여 말했습니다.
2
가끔 저 스스로에게 말하는 심리학적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봐라. 쉬운 말이라 생각하시죠? 도박 중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정답은 자신이 하는 일에 과도하게 긍정적이라는 점입니다.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든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렇습니다. 전 지금 긍정적인 생각을 과도하게 하면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는 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문제를 여러모로 살펴보지 않고 밝은 부분만을 보려고 무리하게 애쓰는 건 위험한 행동입니다.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장단점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3
아주 오래 전 한 시골 마을에 노인이 한 분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튼튼한 말이 한 마리 있었고, 할아버지는 그 말을 아들처럼 소중하게 보살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의 말이 고삐가 풀려 도망가고 난 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할아버지에게 찾아와 안쓰러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이게 나쁜 일인지 누가 안단 말이오?” 며칠 후 할아버지의 말은 짝으로 한 마리 말을 더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 할아버지에게 찾아와 부러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의 놀라움에 한 치도 동요함 없이 할아버지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좋은 일인지 누가 안단 말이오?” 할아버지는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들은 새로 생긴 암말을 조련했는데, 실수로 그만 말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습니다. 목숨을 구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다리를 잃었습니다. 다시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슬퍼 보이지도 그렇다고 말에게 화가 나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이게 나쁜 일인 줄 그 누가 안단 말이오?” 그저 비슷한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몇 년 후 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의 모든 젊은이는 강제 징집으로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보내져 그만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아들은 이전에 당한 사고로 징집을 면제받았습니다. 그 누구도 할아버지 집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4
바로 이 이야기에서 한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생겼습니다. 영어로는 ‘숨어 있는 축복’이라 번역되었죠. 우리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좋은 일이 알고 보니 나쁜 일이었던 때가 다들 있으시죠? 같은 방식으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나중에 보니 좋은 일이었던 때도 있습니다. 50명 남짓 되었다는 영어 회중의 사라짐에서 전 이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사라짐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이니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전히 그 예배당에는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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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꾸 아브라함의 삶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하여 응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행을 시작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아브라함에게 발생한 좋지 않은 일로 생각했을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왜 그러했는지는 몰랐겠죠. 그렇기 때문에 전 우리가 원한다고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건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래서 우리가 가짜로 만든 우월감이 산산이 조각 날 때에만 가능합니다.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된 기원을 죽음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인간이 깨달았을 때 종교가 시작했다는 말이죠. 죽음은 우리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호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문명이란 죽음에 대항하여 발전했고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를 드러내는 실제적 예로는 끝없이 유행하는 성형수술을 들 수 있죠. 젊음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의미 있는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를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분명한 신호입니다. 그 능력은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가는 우리를 여유 있게 바라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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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75세가 되었을 때 삶의 마지막이 그에게도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족이 모두 잠든 날 밤 혼자 깨어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삶의 종착역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뒤흔들면 강박적으로 그걸 외면하기 위해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켜고, 손전화기나 태블릿을 손에 쥐고, 그것도 아니면 포도주를 한 잔 마십니다. 하나님은 끝끝내 아브라함에게 영원히 머물 곳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걸 아시나요? 아브라함은 끝끝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보지 못했다는 걸 아시나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으면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계속 여행했을까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브라함은 대체 무엇을 희망했을까요? 창세기 22장은 우리에게 놀랍고도 신기한 한 가지 대답을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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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떠나보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보다 10살 나이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137세였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네, 아브라함은 사라진 사라를 위해 울며 슬퍼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비극에 휩싸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브라함은 다시 일어났고 사라가 죽을 당시에 머물던 땅을 소유한 사람들인 히타이트족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팔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 가나안 땅 마므레란 지방 근처 막벨라 들판에 있는 동굴을 어떻게 구매하는지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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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사라를 데려가신 것을 제외하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면 하나님은 거기 안 계신 거 같죠? 홀로 남겨진 거 같죠?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창세기 22장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과 그런데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고 느꼈을 때 무엇을 행했는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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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히타이트족이 사는 땅에 속한 동굴을 하나 샀습니다. 그곳에다 아내를 묻었고 자기도 묻힙니다. 그의 아들 이삭과 며느리 리브가도 그 동굴에 묻힙니다. 더 놀라운 건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과 그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도 그곳에 묻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부를 때, 종종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직계 가족이 묻힌 무덤이 있는 곳이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두 번째로 거룩한 도시인 헤브론이 된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면 조상들의 무덤은 헤브론에 있었습니다. 이 무덤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조상 아브라함의 이름을 영원토록 기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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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을 사들임으로써 아브라함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영원을 꾀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젊게 살기 위해 그 어떤 성형수술도 아브라함은 받지 않았습니다. 여기 이렇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강박적으로 사회연결통신망에 글을 계속해서 적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힘 있고 가치 있다는 걸 느끼려고 끝없이 돈만 벌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브라함은 후손들과 영원토록 함께 할 방법을 준비했습니다. 자신이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후손에게 남기고자 했습니다. 후손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한 여행을 넘겨주려 노력했습니다. 그가 이룬 삶을 후손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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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한 가지 문이 막혔을 때면 이미 다른 문이 하나 열려 있다는 걸 기억합시다. 닫힘은 끝마침이 아닙니다. 닫는 게 실은 여는 겁니다. 아브라함처럼 이번 한 주 우리 모두가 닫힘 속에서 열림을, 순간 속에서 영원을, 오늘 속에서 내일을 추구하며 살기 위해 노력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새기는 기도
하나님 우리 능력 너머의 일로 괴로워할 때가, 모든 게 산산이 조각났다고 생각할 때가,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어떻게 당신의 부르심에 응했는지와 아내 사라의 죽음에 대한 당신의 침묵에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묵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능력 너머의 부분은 받아들였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에서는 변화를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지와 어떤 삶을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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