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6주: 녹색)
제목: 뚝심 (이광유 목사)
이 주 전에 전 아홉 살 첫째 아들 지누가 지난 학기 말에 학교에서 집단 왕따 사건에 연루되었음에 관해 말했습니다. 학교 전체 학생 중 아시아계 학생 수를 세기 위해서는 열 손가락을 다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학교에서 제 아들 지누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한 무리를 이루어 같은 반 아이 한 명을 집단으로 괴롭혔다는 거죠. 지누 학교 상담 교사의 짤막한 통보 형식의 전화 한 통 말고는 저와 처가 학교에서 지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6월 14일 학교 감독관이 보낸 편지에는 친구를 괴롭힌 지누에 대한 보다 공식적인 수사가 곧 진행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침착하게 하지만 꾸준하게 달려가야 할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할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매드슨 지역 학교 주임 상담 교사를 만나 잘못된 편지가 서명되어 발송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매드슨 지역 학교 감독관은 공석을 몇 주 동안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런 중 이전 감독관의 비서가 잘못된 편지를 발송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잘못된 편지의 최종 책임은 전 비서에게 있다는 말이냐?”고 제가 물으니 감독관은 이내 말문을 다른 쪽으로 돌렸습니다. 학교 당국에서 행정 절차 중 실수를 범했다는 건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실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행정의 문제였지 사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지난주 수요일에는 지누 학교 교장 선생님과 상담 교사를 만났습니다. 이야기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누구의 잘못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편지를 받아야 했는지를 설명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기에 교장 선생님은 가능한 한 학교 행정 절차 선에서만 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누는 이사를 하지 않는 한 3년은 더 그 학교에 다녀야 하기에 마음속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을 되새겼습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한마디 말이 제 뒤통수를 아주 강하게 빡 하고 때렸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지누의 사교 활동 능력에 장애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두리둥실 하게 내뱉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누를 사무실로 불러 상담할 때 받은 인상과 지누의 말과 행동에 대한 상담 교사의 분석에 근거한 결론이었습니다.
아! 미국에서 지누를 한국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저와 제 처의 굳은 다짐에서 비롯된 한국식 가정 교육 때문에 지누는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이 귀찮게 괴롭힌다고 하면, “지누야, 참아라. 그냥 니가 참으면 그걸로 문제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거든요. 다른 친구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선생님께 고자질해서 이유없이 혼이 났다고 하면, “지누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선생님이 가르치는 걸 잘 배울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한 학기에 한 번 있는 선생님과 학부모 간담회 시간에 선생님이 지누가 쓴 수필을 보여줬습니다. 학교에 오면 자신이 꼭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된 거 같다는 구절이 있었죠. 저희는 집에서 지누가 가끔 학교생활에 대한 푸념으로 그 말을 할 때마다 웃어넘겼고, 그날도 별 생각 없이, 어쩌면 사춘기 아이나 할 법한 생각을 지누가 한다는 사실에서 대견함을 느끼며, 웃음으로 넘겼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지누는 정말 새장 안에 갇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착잡한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지려고 수요일 밤 성경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창세기 37장에서 48장까지 읽을 차례였는데요. 요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수식어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제일 먼저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증손자, 이삭의 손자,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 요셉입니다. 요셉이란 이름을 들으면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나요? 색동옷. 꿈 해석가. 이집트 총리. 성경책에 기록된 그의 삶을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는데, 문득 그의 삶이 제 아들 지누, 미누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책은 요셉에 대한 아주 짤막한 설명으로 요셉의 성품을 설명합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야곱은 목축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결혼 후 20년이 지나서 낳은 요셉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성경책은 야곱이 어떻게 요셉을 편애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하였다. (창 37:3)” 보통 우리는 이 말에서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여 잘못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37장 2절은 꼭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려줍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이 되어 형들과 함께 양을 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두 소실 빌하와 질바의 아들들을 거들어주고 있다가 아버지에게 그들을 좋지 않게 일러바쳤다. (창37:2)” 요셉은 다른 이를 험담함으로써 자신이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리눌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꿈을 꿨습니다. 형들과 부모님이 자기에게 절하는 배은망덕한 꿈을 꾸었죠. 가족 모두가 그런 요셉을 비꼬았지만, 야곱은 그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 아시죠? 야곱은 요셉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위해 달려온 자신의 유전자를 요셉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 굴곡 많은 요셉의 삶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에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배우는 건 재미있습니다. 성공을 눈앞에 두고 땅속으로 곤두박질치길 반복하는 그의 삶에서 우리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요셉의 삶을 예로 제시하는 설교의 주제는 거의가 다 실망시키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확고하게 유지하면 비록 지금은 칠흑같이 어두운 시련 속에서 헤매지만 결국에는 요셉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격려가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만큼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아무리 성경책을 열심히 읽어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습니다. 이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르게 건넬 수 있습니다. “하나님,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토록 모진 삶의 굴곡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의 도전 정신과 인내심이 아들 이삭에게 이어졌고 이삭은 그 위에서 조화와 화해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의 삶은 집념과 집착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요셉의 삶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삶을 위한 미덕은 던져진 삶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후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 곧 뚝심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고자질도 서슴지 않았던 요셉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같은 피를 나누며 태어난 형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43장에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다시 돌아온 형제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요셉이 언제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지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신이 이집트로 노예로 팔린 후 어머니 라헬이 죽으면서 낳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은 요셉은 동생이 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도 자기처럼 형들의 미움으로 힘들어하지 않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설렘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소리 없이 흐느껴 운 요셉은 형들에게 돌아온 후 하인에게 식사를 꺼내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상을 따로 차려 올리고 그의 형제들에게도 따로 차려주고 요셉과 함께 먹는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따로 차려주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 해서 음식을 먹으면 부정을 타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창세기 43:31~32)”
아무 생각없이 흘려 넘길 수 있는 부분인데, 제 눈은 이 성경 구절에서 멈추었습니다. 이집트의 국무총리였던 요셉은 이집트 사람과 한 상에서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집트에 도착한 순간부터 삶의 마지막까지 요셉은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이 문화적 편견에 맞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편견을 없애자고 노력했다면, 이집트 왕이 요셉을 국무총리로 오래 둘 수 없었겠죠. 요셉은 그가 잘 할 수 있는 걸 찾았고, 그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해 집중했습니다. 그런 요셉을 이집트 사람들은 존중했습니다. 이집트 왕은 요셉에게 이집트 나라 살림을 믿고 맡겼습니다. 요셉의 하인들 역시 요셉을 신뢰했습니다. 주인의 말을 듣고 한 마디 질문없이 요셉의 형제들이 메고 온 가방에 식량값을 다시 담았습니다. 막내 베냐민의 식량 가방에 요셉이 자신이 아끼는 물잔을 넣어라는 명령에도 군말없이 따랐습니다. 요셉은 뚝심으로 이집트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넘어갈 수 없는 문화의 장벽을 넘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문화 속에서 사는 제 아들에게, 우리 자신에게 가르쳐줘야 할 건 요셉이 이집트에서 살면서 실천에 옮겼던 뚝심입니다. 기죽지 맙시다. 뚝심으로 버티며 씩씩하게 이번 한 주를 또 살아냅시다.
기도
하나님, 뚝심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살면서 모진 삶의 마법을 끝끝내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가 당신과 씨름하며 사는 중 몸으로 깨달아 개발한 뚝심입니다. 우리도 그 뚝심 배워서 낯선 땅에서 요셉처럼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07/30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7.31 |
---|---|
2017/07/23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7.30 |
2017/07/09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7.10 |
2017/07/02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7.03 |
2017/06/11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