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7/07/02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7. 7. 3. 09:29

본문

(맥추감사주일, 성령강림 후 제4주: 녹색)




제목: 돌다리도 두들겨 본다. (이광유 목사)


지난 한 주간 잘 보내셨습니까? 제법 서늘한 여름이라 더위로 힘들어하지는 않아서 좋긴 한데, 여름이 여름답지 않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사는 지구의 환경이 예전과는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해 마냥 좋아할 수는 없겠죠. 저와 제 가족은, 여름 휴가를 다녀온 바로 그다음 주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마음으로 지난 한 주를 보냈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 시간에 잠깐 언급했지만, 아홉 살 첫째 아들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주 전 금요일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온 저와 처, 두 아들은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린 채 토요일 아침까지 꿈속에서 헤매었습니다. 잠에서 깬 저는 학교 우체국에 가서 지난 십 일 동안 쌓여 있던 우편물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왔고 편지를 하나둘 열어 그 속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습니다. 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발신인은 제가 사는 매디슨 동네 교육청이었고, 수신인은 지누의 부모 혹은 후견인이었습니다. ‘, 이게 뭐지?’ 편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첫 문장은 이랬습니다. “친애하는 부모님 혹은 후견인께, 귀하의 아이가 2017 5 19일 토리 제이 세바티니 초등학교에서 친구를 협박하고 괴롭히고 무섭게 하는 사건에 관여했습니다. 이 사건은 새로운 법조항에 따라 다루어지기 때문에 교육 위원회는 제 권유에 따라 해당 학생을 징계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기보다는 벌컥 겁이 났습니다. 미국에서 공립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럴 때 미국인 부모는 자식을 위해 어떻게 대처하는지, 대처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무엇인지. 모든 게 새로웠습니다. 미국이란 낯선 세상에 첫발을 내딛기 위해 온몸의 촉각을 최대한 곤두세우고 이리저리 살피고 또 살피며 머뭇거리기만 했던 저 자신이 십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런 멍청한 행동을 했을까?’ 동네 교육청에서 보낸 편지였지만 사건의 중대성으로 인해 공권력이 개입하여 추가로 수사를 시작한다는 말에서 한 가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던 건 이런 기록은 한평생 아이를 따라 다닌다는 냉험한 현실 논리였습니다. 제 아이가 불량배로 낙인 찍혔고, 이 주홍글씨는 이 아이의 학적 기록부에 평생토록 남아 있을 거라는 선언이 우회적으로 편지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이를 불러 편지를 보여줬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알 리가 없었지만, 엄마랑 아빠의 심각한 표정에서 아이는 편지가 말하는 사건이 심각하다는 걸 금세 알아챘습니다. 2017 5 19. 그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죠. 당연히 9살짜리 아이가 그걸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혹시나 어떤 아이랑 편하지 못한 관계로 힘들어 하지않았는지에 관해 물었고 아이는 한 아이와의 지속적인 신경전 때문에 짜증이 많이 났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신고자는 밝혀졌습니다. 하긴 5월 어느 날 처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젊은 목소리의 여자가 지누가 학교에서 불량 행동을 했다는 신고를 받았다고 알리는 전화를 받긴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추가로 알아야 할 정보는 차후에 알려준다고 처에게 말했습니다. 한 주 두 주 처와 함께 추가적 소식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기에 별일 아닌가 보다 하고 넘어갔습니다. 별일 아니라 생각했던 일이 이렇게 심각한 일이었다는 걸 처와 전 6 15일에 부친 편지를 6 24일에 열어본 후 알았던 거죠.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는 아이의 어리숙함에 화가 났지만, 실은 낯선 상황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에게 더 많이 화가 났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23장에는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자 매장할 땅을 헷 사람에게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라는 127년을 살다 삶을 마감했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이 100, 자신이 90세일 때 이삭을 낳았으니 이삭이 37세일 때, 사라는 마지막 숨을 쉬었습니다. 유목민이었던 아브라함은 우리처럼 고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 머무는 곳은 언제나 고향이었죠. 사라가 삶을 마감했을 때,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이 정착하여 사는 헤브론에 있었습니다. 헷 사람들에게 다가간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한테 몸붙여 사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나, 내 아내를 안장하게 무덤으로 쓸 땅을 좀 나누어주십시오.” 헷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영감님, 들으십시오. 영감님은 우리 가운데서 세력 있는 귀인입니다. 그러니 우리 묘지 가운데서 가장 좋은 곳을 골라 부인을 모십시오. 영감님이 부인의 묘지로 쓰시겠다는데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27세였던 아브라함은 자리에서 일어나 헷 사람들에게 큰절을 올린 후 다시 말했습니다. “"내 아내를 안장하도록 허락해 주시니 하나 더 청을 올리겠습니다.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말해 그의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동굴을 나에게 양도하도록 해주십시오. 값은 드릴 만큼 다 드릴 터이니 당신들 앞에서 그것을 내 묘지로 삼게 해주십시오." 아브라함의 인품에 감동하였기 때문인지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막벨라 동굴을 무료로 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양했고 헷 사람들은 괜찮다며 어서 사라의 시신을 매장하라고 재촉했습니다. 못이긴 척 고맙게 받을 법도 한대, 아브라함은 끝끝내 은 사백 세겔을 직접 저울에 달아 헷 사람들에게 건넸습니다.


성경 속에 그려져 있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하나하나 뒤짚어 보면 그가 매사에 빈틈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을 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무모하게 무작정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란에서 머무는 동안 모은 재산과 하인을 모두 데리고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철두철미했죠. 소돔에 살던 조카 롯이 그 지역 왕들의 전쟁에 휩쓸려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아브라함이 취한 행동은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더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함께 하란을 떠났지만 불어나는 가축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물을 구할 수가 없었기에 헤어졌던 롯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즉시 집에서 직접 훈련해 준비해 둔 용사 318명을 데리고 롯과 가족을 구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무모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처 사라를 매장한 후에 아브라함은 신뢰하는 종을 하란에 보내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구해오도록 합니다.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이어질 자손의 미래를 걱정했고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게 다 주어진다고 주장하면서 대표적 예로 아브라함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죠?


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막벨라 굴에 매장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왜 무료로 이용하라는 헷 사람들에게 굳이 직접 저울질에 따라 계산한 은 삼백 세겔을 건넨 후 막벨라 굴을 샀을까요? 탄생이 희망을 뜻한다면 소멸은 사라짐을 뜻하는데요. 무덤은 소멸하여 사라지는 대상을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몸은 사라졌지만 한 사람이 남긴 발자국, 삶의 흔적을 기억하는 장소가 무덤입니다. 아브라함도 삶을 마감한 후 이 막벨라 굴에 묻힙니다. 그의 외아들 이삭도 37세에 만나 결혼한 후 한평생을 함께 한 아내 리브가와 함께 이 막벨라 굴에 묻힙니다.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을, 속임수를 부렸지만, 부여받은 둘째 아들 야곱도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레아와 함께 이 막벨라 굴에 묻힙니다. 막벨라 굴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가나안 땅에 속했기에 혹자는 가나안 땅 쟁취를 시작한 이가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합니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쟁보다는 막벨라 굴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탄생한 한 민족인 이스라엘의 시조가 묻혀 있다는 사실이 후손들의 마음속에 안길 울림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사에 빈틈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75년 동안 살았던 삶을 과감하게 접고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철두철미한 사람은 쉽게 꿈을 꿀 수가 없습니다. 꿈을 꾸려면 좀 무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떠난 새로운 삶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를 바라보며 꿈꾸는 법을 배웠고, 꿈은 철두철미함이 뒷받침될 때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처와 저는 6 26, 조금 늦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단호하게, 매디슨 교육청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날 오후 매디슨에 있는 학교 상담가를 만났고, 사건 정황에 관해 묻고 대답을 듣는 가운데 저와 처가 받은 지누에 대한 편지는 잘못 준비된 편지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지누 학교 교장 선생님의 전자 편지로 한 학생의 학부모가 지누를 포함한 여러 명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괴롭힌다고 학교에 신고했고 학교 상담가는 아이들과 일대일 면담을 통해 괴롭힘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지누의 학적 기록부에는 이 사건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을 거라는 말을 교육청 관계자는 거듭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 와서 낳아 기르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저와 처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사건의 진위를 조금 더 확인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지누가 어떠한 피해도 당하지 않는다는 걸 한 번 더, 두 번, 세 번 더 확실하게 당조짐(단단히 단속하고 조임)할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고자 우리는 모두 노력합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철두철미함 또한 본받아서 삶의 여정에서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호랑이 굴에 떨어져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호랑이 굴에 떨어져도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럴 수 있다는 걸 오늘 배웠습니다. 낯설어서 익숙함을 벗어나 살기가 어려운 이민 생활에서 아브라함의 철두철미함이 그의 무모한 믿음의 여정만큼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