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후 제7주: 녹색)
말씀: 출애굽기6:1~10
(9)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대로 전하였으나, 무서운 고역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목: 출出일상 (이광유 목사)
지난주 수요일 아침 4시 30분에 일어난 제 가족은 아침 햇살이 세상을 밝히기도 전에 남부 뉴저지를 향해 떠났습니다. 수요일 밤에 한국에서 장모님과 처의 둘째 언니 식구가 저와 처, 지누와 미누를 보러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미국에 오는데 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남부 뉴저지로 갔느냐란 의문이 제기되죠? 매년 여름이 찾아오면 3년 전부터 저희 가정의 마음은 남부 뉴저지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바닷게 잡기를 할 수 있거든요. 이어령 선생님은 생명자본주의란 책에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자본은 생명이라고 주장하셨는데요. 그 이유 중 하나로 생명은 거저 주어지는 자본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죠. 맞습니다. 바닷게를 잡는데 필요한 건 미끼로 던질 닭 다리랑 닭 다리를 먹는 바닷게를 잡을 채만 있으면 됩니다. 아니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네요. 바닷게를 잡으려면 바닷게가 있어야죠. 바닷게가 있는 바다, 그것도 바닷게가 생육하여 번성하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바다가 있어야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 제 가족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닭 다리를 챙겨 자동차 짐칸에 실은 후 남부 뉴저지 바닷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6시가 조금 넘어 목적지에 도착하자 저는 지누와 미누와 함께 차에서 내려 게잡이 준비를 시작했고 처는 아침거리를 사러 근처 가게로 갔습니다. 만滿솥이었습니다. 닭 다리를 바닷속으로 내리기만 하면 한 뼘보다 더 큰 바닷게가 두서너 마리씩 달려들었습니다. 가지고 간 커다란 솥에 잡은 바닷게를 더 넣을 수 없게 되자 음료수 가방을 비워 그 속에다 잡은 바닷게를 넣었습니다. 맛있는 닭 다리를 뜯어 먹느라 낚시꾼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낚싯줄을 조용히 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버린 바닷게를 바라보다 문득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렇죠. 우리 또한 눈앞에 놓인 이익을 억척스레 움켜쥐고 늘어졌다가 거의 모든 걸 잃어버리곤 하죠. 닭 다리에 정신을 빼앗겨 인생 줄이 끊긴 바닷게나 돈줄에 매달려 미래를 잃어버린 우리.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별반 차이가 없겠더군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이집트 탈출 사건에 대한 기록을 성경책에서 읽을 때면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왜 이집트 왕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을까? 그렇잖아요.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왜 한 가지가 아닌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출애굽을 완성하셨을까요? 왜 하필 모세라는 사람을 선택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삼으셨을까요? 이보다 더 궁금한 건 왜 이스라엘 민족으로 가나안 땅으로 곧바로 데려가지 않고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게 하셨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 마음 가는 대로 뭐든 하고 싶은 마음이죠. 이걸 심리학에서는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우리가 고상하게 말하는 자유의지는 실제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게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의 마음 상태, 곧 욕망을 말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면 이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깨달음을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해주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행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는 사실 잘못한 행동이 낳은 결과에 대한 깨달음을 모아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크게 당하더라.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는 게 좋다. 지혜란 실수에 대한 숙고에 모음집이죠.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이 지혜란 경험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혜의 경구를 귀가 닳도록 듣고 입술이 불어터지도록 달달 외우더라도 막상 그런 상황에 이르면 머릿속 지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건 역시나 만족이란 단어를 모르는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이죠.
성경책을, 특별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분하게 읽다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점도 인간의 욕망이란 걸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 복을 향한 욕망이죠. 이삭. 조화와 화해를 향한 욕망. 야곱. 원하는 건 싸워서 만들어내는 욕망. 요셉. 어릴 적 꿈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욕망. 같은 피를 나누었지만 다른 시대 다른 삶을 산 이스라엘 민족 조상의 삶을 똑같이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각자의 삶 속에 찾아와 거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욕망을 일부러 억누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는 하나님. 이건 너무 흔한 말이죠. 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조상들이 모두 각자의 삶에서 자신의 욕망과 싸워 이기기를 바라셨습니다. 진정한 교육은 스스로 교육하는 방법을 깨닫도록 하는 교육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것에는 결코 가르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스스로 깨쳐야 하는 게 있습니다. 저는 그게 자신감 혹은 자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믿을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이렇게 잘할 수 있구나. 진정한 자신감과 자존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관문이 하나 있습니다. 주제 파악입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치를 아는 겁니다. 현대 교육은 한계란 없다고 가르칩니다. 네, 엄밀히 말해 배움과 공부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한계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정한 자존감과 자신감은 우리 존재의 한계를 깨달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스라엘)과 형제들이 이집트로 이사 왔을 때 이집트 중심부가 아닌 가장자리 지역 고센에 머물게 했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을 이집트 파라오 왕에게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농경 민족이었던 이집트 사람들은 유목민을 무시하여 함께 생활하길 꺼렸습니다. 국무총리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고 이로 인해 이집트 문화 바깥 지역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모두 죽은 후 이집트에 들어와 산 야곱 후손들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얼마 뒤에 요셉이 죽고 그의 동기들과 그 시대 사람들도 다 죽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가득 찰 만큼 무섭게 불어났다. 그런데 요셉의 사적을 모르는 왕이 새로 이집트의 왕이 되어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일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듯 무섭게 불어나니 큰일이다. 그들이 더 불어나지 못하게 기회를 보아 손을 써야겠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원수의 편에 붙어 우리를 치고 나라를 빼앗을지도 모른다." (출애굽기 1:6~10)
이집트 역사 이래 최고의 가뭄을 최고의 기회를 바꾼 이스라엘 계 국무총리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왕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구도 풀지 못했던 파라오 왕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했던 하나님의 영이 함께했던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는 왕이 등장했습니다. 이 말은 이집트 사람뿐만 아니라 야곱의 후손 또한 자신의 조상 요셉이 이집트에서 어떠한 일을 했는지를 잊었다고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집트 사람뿐만 아니라 야곱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한 시대가 왔습니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잊어버린 사람들이 일구어가는 삶에서는 적자생존의 논리가 전부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해야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다른 이로부터 빼앗은 물질, 곧 돈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을 만들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배려하지 않는 사회. 다른 이의 상황을 헤아리지 않는 사회. 일 말고는 다른 걸 할 수 없는 사회. 자식이 짐이 되는 사회. 이런 강퍅한 삶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이스라엘 민족은 결국 하나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우성을 지르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에게 나가 이스라엘 민족이 사흘 동안 광야로 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마음이 모이는 곳은 어디나 예배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말 아시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데리고 가 예배드리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야곱의 조상이 하나님을 만난 곳을 생각하면 간단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착할 곳 없이 떠도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요셉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공간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집트는 예전에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 곧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볼 때, 이집트는 먹고 살기에 집착하여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란 삶의 근원적인 물음을 깡그리 잊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야곱의 후손에서 영원을 바라며 붙잡고 씨름하는 법을 잊어버린 채 숫자의 노예가 된 우리의 모습을 읽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의 출애굽이 우리 삶의 자리로 옮겨지면 출出일상이 됩니다.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일상을 벗어났다는 말이 일상을 피하거나 외면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상을 벗어나야 일상 너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죠. 이번 한 주가 출애굽의 중요성을, 출일상의 중요성을 깨닫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이 실은 이 세상 적자생존의 논리에 묶여 하루하루 돈, 지위, 명예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란 걸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건 분명합니다. 그런 일상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여 출出일상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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