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보존주일, 삼위일체주일: 흰색)
제목: 포기(抛棄), 가능한가? (이광유 목사)
지난 수요일 처는 미국 연합 감리교회 한 목사님과 목사 안수 과정을 준비하는 만남과 몇 달 전부터 시작한 치아 치료를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산다는 건 하루를 누리는 게 아니라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 지란 투쟁으로 바뀌었습니다. 수요일은 제가 도서관에서 일하는 날이 아니기에 처는 그날 밖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을 한꺼번에 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거죠. 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와 일 보러 나가는 처를 배웅한 후 방 청소와 빨래를 시작했습니다. 방 청소를 할 때면 제 마음에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내가 이렇게 먼지가 많은 집에서 살고 있었던가? 먼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쓸고 닦고, 또 쓸고 또 닦아도 바닥에는 먼지가 한가득 숨어 있죠. 두 번째 생각은 이 쓰레기, 이 먼지를 최소화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다짐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사람만큼 몰지각하고 이기적인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방 청소 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그리 넓지 않은 집에 버려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 한 명이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만들어 내는 쓰레기양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미국에서 행한 한 가지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한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만드는 쓰레기는 102톤 정도 된답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안 오죠? 1톤짜리 트럭을 생각하면 됩니다. 1톤 짜리 트럭을 102대 일렬로 세운 걸 머릿속에 떠올리면 여러분이 한평생 살면서 만들 쓰레기양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자 환경선교주일입니다. 예전에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님도 환경선교주일이란 말이 좀 이상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환경은 선교할 대상이 아니죠. 환경은 아끼고 보살펴 보존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환경‘선교’주일이란 말을 환경‘보존’주일로 바꾸었더니 그 말이 전하는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해졌습니다. 환경보존주일이란 단어를 마음속에 품고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대해 생각하면 약간 겁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겁이 나야 합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에 대한 학자들의 경고는 수십 년 전에 시작했지만 지금 우리 각자 집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면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실행했고, 다양한 환경 문제가 눈에 띄었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박근혜 정권이 현 정권에 떠넘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에 강제적 제한을 가한 4대강 사업이 우리에게 돌려준 건 급속하게 파괴되는 한국의 자연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는 화창한 봄 햇살을 만끽하기가 가뭄에 콩 나듯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는 대기에 엄청난 양의 먼지가 섞이게 했고 중국과 붙어 있는 한반도는 매년 직접적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는 왜 하나님께서 당신이 손수 창조한 세상을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차분하게 첫 구절부터 읽기 시작하면 이내 의구심이 생깁니다.
사람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 딸들이 많이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창세기 6:1~2)
‘네피림’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들을 어떤 학자는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천사라고 추측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고대 시대에 살았던 거인족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더 신빙성 있다고 여겨집니다. 거인족 남자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욕망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말이죠. 선악을 알게 해 주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죠.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삶이 심사숙고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거죠. 그렇게 마음대로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낳은 후손은 용사, 곧 전쟁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논리에 따라 영원한 삶을 꿈꾸며 영생을 알게 하는 나무를 찾으며 살아야 사람들이 즉각적인 안전과 안위를 위해 여행자가 아닌 용사가 되어 삶을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남보다 더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싸움을 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땅에 가득한 것과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고 땅에 사람을 만든 것이 후회가 되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상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으로부터 짐승과 땅에 기어다니는 생물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만든 것이 정말 후회가 되는구나.’ (창세기 6:5~7)
지난 수요일 학교가 파한 아이들을 학교에서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드류에서 함께 공부하는 페루에서 온 친구를 만나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의 큰아들과 딸아이의 나이가 제 두 아들과 엇비슷해서 아이들 등굣길을 번갈아 봐주는 사이라 나름 격의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지만 여름 같지 않은 이상한 날씨로 시작한 이야기는 지구 온난화 현상과 환경 오염, 우리 자손이 살게 될 미래의 지구에 대한 염려로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그는 페루에 파나마 운하 같은 운하 건설이 곧 시작할 건데 이로 인해 생겨날 다양한 환경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지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머뭇거리던 제가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한국 기록영화 지구의 눈물 중 남극의 눈물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빙하 한 조각 위에 한 무리의 펭귄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다표범이 나타났고, 겁에 질린 펭귄은 약속이나 한 듯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다표범은 생각보다 빨랐고 느리게 움직였던 펭귄 한 마리를 잡아챘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펭귄 한 마리를 입에 문 바다표범이 만족스럽게 헤엄치며 사라지자 바닷속에 뛰어들었던 펭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그 빙하 위에 올라와 또 다른 한가로운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준 저는 “팔은 안으로만 굽는다.”는 한국 속담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바다표범 같은 위험이 우리 삶에 찾아왔을 때, 다른 사람과의 연합을 애타게 바랐던 사람 대부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가까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연합 전선을 과감하게 깬다고. 그리고 그게 사람이라고. 그는 놀란 눈으로 절 바라보더니 더는 연합에 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연합의 어려움이었지만요.
지난 주일 전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핵심 원리는 분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천지 창조 작업의 끝자락은 끝나지 않은 채 인간인 우리에게 주어졌다고도 말했습니다. 하나였던 남자와 여자는 둘로 나누어져 삶을 시작하지만, 연합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과 죽음을 알 수 있는 나무의 열매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서 건강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담긴 대홍수 사건은 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닷물에서 헤엄을 치다 파도에 휩쓸려 본 경험이 있는 분은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도 물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물이 생명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물질이란 걸 알고 계시죠? 남자의 경우에는 몸의 60할이, 여자의 경우에는 55할이 물입니다. 더 신기한 건 세례 요한은 이 물을 사용하여 새로운 인간 존재의 탄생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렸습니다. 예수님 역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예수님 머리 위를 날았습니다. 여기서 물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현상을 상징합니다.
창세기 6장에서 시작하는 대홍수 사건은 인류 멸망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새로운 천지 창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천지 창조의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천문학적 숫자인 우주적 시간이라면, 지금 이 순간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처럼 우리 또한 방주를 지어야 할 때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방주는 원자재를 사서 우리 각자 집 지붕에 지어 올려야 할 진짜 방주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 마음속에 지워야 할 방주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어떻게 방주를 지어야 하는지를 설명한 후에 방주 안에 태울 사람과 들짐승, 하늘을 나는 새와 음식에 관해 설명하셨습니다.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동시에 새로운 창조 작업에 동참해야 할 우리가 어떻게 삶을 대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그 날 필요 이상의 음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걸 가지는 순간 인간은 탐욕의 노예가 됨을 아셨기 때문이겠죠. 삶을 전쟁터로 대하는 용사의 탄생은 욕망이자 탐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는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씩 배 안에 넣어 너와 함께 살아남도록 하라. 새와 짐승과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것이 종류대로 각각 암수 한 쌍씩 너에게 나아올 것이다. 너는 그 모든 생물을 보존하라. 너는 또 너와 그 모든 생물들이 먹을 양식을 배 안에 충분히 저장하라'. (창세기 6:19~21)
전 지구의 미래는, 우리 인간 삶의 지속성은,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만큼 뼛속까지 스며든 문명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고 넘치는 것보다는 조금 모자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조그만 것에 행복할 수 있고, 그 속에서 하늘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가난했던 초대 교회 공동체. 가난해서 가진 것을 나누어 썼고, 그랬더니 어느 한 사람 결핍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번 한 주 뼛속까지 파고든 문명의 편리함을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도
하나님, 환경보존주일과 삼위일체주일을 맞이하여 창세기 6장에 담긴 대홍수 사건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대홍수는 이미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가 직접 겪고 있지 않기에 강 건너 물 구경만 하고 있었던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연합도 생존도 어쩌면 너무나 간단한 이치. 넘지 말아야 할 산은 넘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란 걸 또 한 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넘쳐 나는 쓰레기 속에서 사는 삶이 아니라 쓰레기를 적게 만드는 정갈한 삶 살고 싶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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