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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4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7. 6. 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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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주일, 성령강림절: 적색)




제목: 천지창조의 끝자락 (이광유 목사)


지난주 화요일 밤에 언제나처럼 지누를 데리고 유도장에 갔습니다. 하품을 연거푸 하는 모습이 영 따분하고 지겨운 듯 보였습니다. 유도 사부님이 몇 가지 기술을 보여주고 연습하라고 말씀하셨고 머릿수를 세어보니 제가 지누를 데리고 연습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사부님의 시범을 떠올리며 제가 먼저 지누에게 호신술을 연습했고 지누에게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제 손을 내주었습니다. 졸고 있었습니다. 눈을 뜬 채로. 마침 옆을 지나가던 다른 사부님이 어떻게 하는지를 모른채 멍하게 서 있는 지누에게 다가와 제 손을 붙잡고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제 손을 붙잡은 지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졸고 있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사부님이 다시 동작 하나하나를 설명하자 간신히 흉내 내며 연습을 마쳤습니다. 제 차례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누의 손을 붙잡고 시범을 따라 몸을 움직였는데, 지누가 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재빨리 반응할 수 있도록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순간에 지누는 졸고 있었고, 그 결과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꺾인 손목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꺾인 손목은 올해 초 스케이트 보드 위에서 떨어져 부러진 오른쪽 손목이었습니다.


            아프다고 손목을 붙잡은 지누를 보니 화가 났습니다. 즐겁고 재밌는 것만 골라서 하려는 녀석의 모습이 종종 제 맘을 거북하게 만들었었는데, 유도장에 와서 졸린다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몸 하나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한 모습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다양한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데, 각 공동체는 나름대로 말없이 따르고 지켜야 할 원칙에 따라 꾸려집니다. 지누와 함께 다니는 유도장에 함께 모이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지키는 원칙은 몸과 마음의 두려움과 싸우기입니다. 저보다 강한 사람이 제 도복 깃을 붙잡으면 곧 던져질 것 같은 두려움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짓눌린 제 마음은 제 몸을 누르는데, 두려움에 눌린 몸은 뻣뻣해져 움직임마저 둔해집니다. 이런 몸과 마음 상태가 한 인간 삶을 전반적으로 지배할 때, 심리학은 트라우마라고 이름 붙입니다.


            어쨌거나 집으로 돌아와 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반항기가 많아져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유도는 좋아할지라도 유도를 위한 자세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지누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는 제 말에 제 처는 지누는 아직 어린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빠와 엄마, 아내와 남편 사이의 이야기로 쥐도 새도 모르게 이어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분명히 이야기의 시작은 지누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였는데, 이야기의 마지막은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해 주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답답함이었습니다.


            그루터기 교회는 가족의 달인 오월 한 달 가족에 대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스승의 주일, 부부 주일을 차례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원래는 지난 주일, 오월의 마지막 주일이 부부 주일이었지만 한 주 뒤로 미뤄 오늘은 부부 주일로 지킵니다. 부부에 대한 말씀을 찾기 위해 지난 한 주간 성경책을 뒤적거렸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책은 농경사회가 아닌 목축사회에서, 모계사회가 아닌 부계사회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성보다는 남성을 훨씬 더 존중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강조는 요한계시록에도 담겨 있지만, 그의 아들 이삭을 늦은 나이에 잉태하여 낳은 사라에 대한 언급을 성경 66권 중에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책은 남성을 위한 책입니다. 아버지를 위한 책이고 아들을 위한 책입니다. 가부장제 사회를 하나님께서 축복했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2장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창세기에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천지 창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바짝 긴장하고 읽지 않으면 그 다름을 찾을 수 없게 편집에 편집을 거듭한 두 가지 상반된 창조 이야기가 조화롭게숨겨져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이 바로 그건데요. 1장이 2장과 극명하게 다른 부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시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7일이라는 창조 작업 시간 중 6일째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5일 동안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창조한 피조물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그 순서를 뒤바꾸셨습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은 인간이 머물 장소로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 후 각종 나무와 풀이 에덴동산에서 자라나게 만드셨고,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으셨습니다. 그 와중에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물은 네 갈래 강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 홀로 사는 아담을 바라본 하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혼자 사는 건 좋지 않겠다. 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짝을 만들어줘야겠다.’ 하나님은 사람의 짝이 될 수 있도록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자기 앞에 있는 동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건 스치고 지나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소통하는 관계를 맺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게 이름이죠. 누군지를 알 수 없는 이가 이름을 불러 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면, 이름 부르기 속에 담긴 소중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성경책은 수많은 들짐승과 공중을 나는 새에 파묻혀 살지만, 여전히 외로운 아담을 아주 짤막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아담에게 적합한 친구 혹은 도우미는 없었다. (2:20)”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하나님은 아담의 몸속에서 갈비뼈를 하나 꺼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 목사님은 몸속에서 갈비뼈를 꺼내는 건 무척 아프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마취제를 주셨기 때문에 아주 깊이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글쎄요. 심리학에서는 잠을 의식의 반대인 무의식으로 봅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에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속에서 갈비뼈를 하나 꺼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본 후 말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창세기 2:23)”


            아담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실은 자기 몸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성적 본능이 아닙니다. 성적 본능보다 더 깊은 마음의 떨림을 통해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었지만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말은 옷을 벗었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무장하는데 사용한 다양한 속임수, 체면, 가식, 허위의식을 모두 버렸다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 대면한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상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2:24)” 이 말속에 천지창조의 마지막이 담겨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였지만 서로를 도울 수 있도록 둘로 만들어진 남편과 아내. 그러고 보면 천지창조는 나눔의 과정입니다. 빛과 어둠이 나뉘었고, 하늘과 땅이 나뉘었고, 바다와 육지가 나뉘었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가 나뉘었고, 살고 죽음과 옳고 그름이 나뉘었고,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나뉘었죠. 하나님은 당신께서 나눈 걸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다시금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누어진 걸 다시 하나로 엮어가는 게 하나님 천지창조 끝자락입니다. 나누어진 걸 다시 하나로 묶는 방법은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 하와를 창조하는 과정에 숨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묘한 마법에 걸려 이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며 한 결혼. 얼마 못 가 마법 기운 떨어지면 아차 속았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 비명이 결혼 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동안 꼭꼭 감춰왔던 우리 진짜 모습을, 혼자 있을 때만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이죠. 그 모습을 보여주고 보고. 그럴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겠죠.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로다!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무장한 저와 아이가 무엇을 아느냐면 끓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누르다 그게 힘들어지면 아이 아빠에게 위엄을 부리는 처는 그다음 날 말 없는 타협에 이르렀습니다. 그래. 아이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다. 더 많이 이뻐하고 사랑해줘야지. 왜냐고요? 제 살과 제 처의 살이 섞여, 제 뼈와 제 처의 뼈가 섞여 만들어진 아이가 지누거든요. 부부 생활, 가정생활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 작업의 연장선이란 걸 기억합시다.

 


기도


하나님,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며 부부 생활에 대해 잠깐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옳고 그름보다는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법과 질서보다는 인정과 연민으로, 훈계와 훈육보다는 위로와 다독임으로 피와 살이 섞여 하나가 되는 부부 생활, 가정생활을 계속 해 나겠습니다. 그게 당신 창조 작업의 끝자락임을 명심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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