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 회심주일, 스승의 주일, 부활절 제6주: 흰색)
말씀: 열왕기하2:1~14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제목: 가르침과 새김질 (이광유 목사)
요즘 전 ‘진정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일생을 사는 동안 배울 수 있는 내면의 힘 중 진정성을 마지막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인간 삶의 여정을 어느 한 산꼭대기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에 견줄 때, 진정성은 결국 바다와 하나가 된 빗방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자 할아버지가 위정편(爲政篇)에서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이 서른에 살면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뜻을 확고하게 세웠고(三十而立), 마흔에는 주변 상황에 미혹되지 않게 되었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다른 이가 하는 말을 차분하게 들으면 그 속에 담긴 그가 살아오며 형성한 삶의 이치를 알 수 있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지라도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되었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옳고 그름을 벗어나 진정성에 이르렀다는 말이죠.
네. 문재인 대통령이 소신껏 펼쳐 나가는 정책을 보면서 진정성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옳은 건 옳고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이 옳고 그름에 수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겠죠. 이보다 더 힘든 게 있다는 건 나이 서른을 넘어서니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네, 옳다고 믿는 걸 실천에 옮기기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말씀하셨죠.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라고. 그리고 덧붙이셨죠. 사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보다 더 먼 거리가 있는데, 그건 가슴에서 손끝 혹은 발끝까지의 거리라고.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하는데, 깨달음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일어납니다. 깨달음, 곧 뜨거워진 가슴은 불 위에 놓은 냄비처럼 불을 끄고 나면 금방 식습니다. 이걸 방지하고 온기를 계속 유지해 주는 게 실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행하는 정책, 뭐 그리 대단하다거나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도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걸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묵묵하고 당당하게 실천에 옮기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에 겁을 먹는 사람만큼 많은 사람은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진정성에서 우러나는 온기에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은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와 함께 그루터기 감리교회는 5월 셋째 주일을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 최고의 스승이기도 하셨죠. 지금도 감리교의 기원과 특징을 말하기 위해서는 존 웨슬리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감리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ethodism’은 ‘방법’ 혹은 ‘체계성’을 뜻하는 ‘method’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정한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그의 성격이 종교 생활에도 고스란히 녹아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며 성경 속 인물 중 멋진 선생의 모습을 보여준 이가 누굴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기억하는 최후의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곳곳을 다니면서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을 가르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엘리사 혹은 그의 스승 엘리야가 부활한 게 아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열왕기하는 엘리사가 하늘로 떠나는 스승 엘리야를 배웅하는 장면입니다. 동시에 스승 엘리야의 그늘을 벗어나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내면화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날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걸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자신이 그동안 담당했던 예언자 직을 제자 엘리사가 이어받아야 했습니다.
엘리사를 위해 엘리야가 택한 인생 마지막 수업의 주제는 역사였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조상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배우는 지식 중심의 수업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 일어난 역사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는 탐사 수업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간 네 곳은 길갈, 벧엘, 여리고와 요단 강입니다. 지도를 펼쳐 네 곳에 점을 찍어 놓고 보면 하룻길에 모두 다니기란 쉽지 않은 먼 거리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단호했습니다. 마지막 수업인데,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가 궁금하시다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네 곳에서 이스라엘 조상이 무엇을 경험했는지를 되짚어 보면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찾아간 첫 번째 장소는 길갈입니다. 이집트를 벗어나 40년 동안 광야살이를 한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요단 강을 건넙니다. 가나안 정복을 준비하며 그동안 쌓인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잠깐 멈춘 곳이 길갈입니다. 열두 부족 대표가 요단 강을 건널 때, 돌덩이를 하나씩 주워 길갈에서 돌 기념비를 세웠고, 광야살이 중 태어난 남자는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후 그곳을 길갈(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수치가 굴러갔다)란 이름을 붙입니다. 길갈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넘어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도기적 시간과 장소를 상징합니다.
길갈에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리고 다른 장소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장소의 이름은 벧엘. 야곱이 생각나시죠?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 축복기도를 빼앗은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충고를 받아들여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으로 떠납니다. 아시다시피 ‘마마보이’였던 야곱은 리브가 옆에서만 생활했기에 다시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지은 천막집 밖을 떠나서 살아가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야곱은 광야에 들어가 난생처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살아서 다시금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믿었던 하나님을 자기 또한 간절히 믿겠다고. 그날 밤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을 때, 꿈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들음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에 감격한 야곱은 돌이 무성한 광야를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벧엘은 야곱의 신앙이 들음에서 깨달음으로 옮겨간 곳입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이 시작한 순간었죠. 벧엘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 했던 과도기적 공간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간 곳은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서 피로를 해소한 이스라엘 민족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전쟁에 임하여 승리한 곳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칼과 창 같은 무기로 무장을 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칼과 창 대신 나팔을 들고 일렬로 여리고 성 주변을 돌았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민족은 ‘지략과 용맹’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무너뜨렸습니다. 거인 골리앗을 상대할 때 다윗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너는 칼과 창을 가지고 나왔지만 나는 전능하신 여호와,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 주실 것이며 나는 너를 죽여 네 목을 자르고 또 블레셋군의 시체를 새와 들짐승에게 주어 먹게 하겠다. 그러면 온 세상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데 창이나 칼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 그분이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 (사무엘상17:45~47)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요단 강에 갔습니다. 강가에 이르자 엘리야는 겉옷을 벗어 요단 강을 쳤고, 강은 두 갈래로 나뉘어 마른 땅이 그 사이로 드러났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리고 요단 강 속으로 들어가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데려가기 전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느냐?”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을 통해 한 일의 갑절이 제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스승 엘리야가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나지 않길 바랐던 엘리사가 변했습니다. 스승보다 더 대단한 예언자가 되길 바랐습니다.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하지만 네가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서 어떻게 데려가시는 지를 목격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거다.” 불 병거를 타고 스승이 하늘로 사라지는 걸 본 엘리사는 자신의 윗옷을 벗어 둘로 찢은 후 바닥에 떨어진 엘리야의 옷을 주워 든 후 요단 강가를 나와 언덕에 올랐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십니까?”라고 외친 그는 엘리야의 옷으로 강을 내리쳤습니다. 요단 강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참된 배움은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참된 깨달음은 언제나 우리를 과도기적 공간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과도기적 공간에서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배움이 참된 배움이니 거짓된 배움인지는 깨달음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옷으로 요단 강을 내려쳤습니다. 깨달은 걸 가지고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에 도전했습니다. 달걀로는 바위를 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제대로 배운다면,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달걀로 바위를 깨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바위를 깨는 건 달걀이 아닙니다. 달걀 속에 진정성이 있다면 바위를 깰 수 있습니다. 진정성으로 무장한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진정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앎과 행함의 일치만이 진정성이 될 수 있음도 알았습니다. 이번 한 주 우리가 하는 일에, 우리의 행동에, 우리의 생각과 말에, 진정성이 가득하길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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