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제4주, 어린이주일: 흰색)
말씀: 베드로후서1:1~10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제목: 두 가지 서로 다른 힘
투표 잘하셨죠? 무슨 말이냐고 물으시는 분은 미국에 살지만, 고국 대한민국에는 전혀 관심을 두고 살지 않으신다는 말이 되니 아마도 미국으로 넘어오신 후 서둘러 영주권과 시민권을 획득하셨을 겁니다. 이틀 후죠?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 전 이주 전 토요일, 4월 29일에 처와 아이 둘을 데리고 뉴저지 팰리세이드파크 한인회 사무실에 가서 재외국민으로 조금 일찍 투표했습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투표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리 넓은 주차장은 아니었지만 빼곡하게 주차된 차가 보였습니다. 차를 주차한 후 큰아들 지누랑 유도 연습을 하며 걸어가는데, 둘째 아들이 처에게 말했다네요. “엄마, 근데 저기에 왜 지원이가 있지?” 지원이는 제가 좋아하는 후배 전도사님의 첫째 딸 이름입니다. 뉴욕 스태이튼 아일랜드에 사는데, 투표하러 그곳까지 찾아왔던 거죠. 그러고 보니 투표소 안팎에는 유난히 젊은 사람이 많이 보였습니다. 대통령 선거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젊은이들이 작년 한국에서 일어난 영화보다 재미있던 현실을 직시한 후 무언가를 하긴 해야겠다고 단단히 각오한 게 틀림없습니다. 처는 감격스럽게 말했습니다. “맞아요! 젊은 사람들이 움직여야 뭐가 돼도 되는 거죠.” 자기는 이제 충분히 늙었다는 말인지, 전 그냥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군 복무와 재기훈련으로 보낸 삼 년 간의 공백을 깨고 올 초 미국 종합격투기 경기에 복귀한 정찬성 선수는 재기전을 승리로 장식한 후 경기 진행자와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불안한 대한민국 사회를 위해 “강하고 [마음씨] 따뜻한 지도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격투 선수가 “강한”이란 단어를 사용해서인지 그 말을 듣고 머릿속에 그려진 대통령의 모습은 근육질이었습니다. 근육질만큼 단단한 의지와 결단력 또한 떠올랐죠. 그런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까를 놓고 저울질을 시작하니 지도자의 강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전 정찬성 선수가 자기만의 분명한 생각과 뜻을 가지고 삶을 대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강인함과 따뜻함을 함께 엮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강인함이 남성미를 상징한다면, 따뜻함은 여성미를 상징하기 때문이죠. 전 여성해방운동가가 아니지만, 남성 우월주의자도 아닙니다.
여성해방운동의 근거지는 미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여성해방운동은 사실 세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시작했습니다. 가정과 사회, 국가를 위해 열심히 땀 흘려 일해야 할 젊은이가 전쟁터에 가니 누군가는 대신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가정을 삶의 유일한 공간으로 알던 여성들이,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면, 아줌마들이 남편이 하던 일을 대신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을 벗어나 사회로 진출한 여성의 외모에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게 어디인지 아시나요? 쌍꺼풀 수술일까요? 보톡스로 볼록하고 탄탄해진 볼을까요?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데, 긴 머리카락은 위험했고 생산성에 지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전 여성해방운동가도 남성 우월주의자도 아니지만,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르다는 자연스런 법칙을 다양한 이론을 앞세워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던 제자 시몬 베드로가 쓴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신인은 사도 바울이 쓴 편지의 수신인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후 모여서 신앙 공동체를 이룬 초대 교회 교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부분 중에서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사도 베드로가 생각한 강인한 신앙인이 되는 방법입니다. 제가 한 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후서 1:5~7)
간단한 구절인데, 결코 간단하게 들리지 않죠? 베드로는 강인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믿음.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한 말 중 제 마음속에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긴 건 심리학자 칼 융이 죽기 2년 전 1959년에 미국 국영 방송사 BBC와 가진 회담에서 한 말입니다. 대담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나요?” “아, 네.” “그렇다면, 지금도 믿고 있나요?” 심리학자 융이 대답했습니다. “지금요?” 약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대답하기 어렵네요. 전 알고 있어요. 믿어야 할 필요가 없어요. 전 알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건 경험하지 못했지만 알고 싶다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행위입니다. 안다는 건 경험했다는 말이죠. 보았고, 만졌고, 알았다면 더는 믿을 필요는 없다는 융의 대답. 엄청나죠?
베드로가 말합니다. 이런 경험 위에 쌓아야 할 건 덕(德)이라고. 덕(德)이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행하려는 어질고 올바른 마음이나 훌륭한 인격’을 뜻합니다. 절대자를 경험하여 안 이는 유한함에 갇힌 인간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덕을 가졌다면, ‘배우거나 실천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인 지식(知識)을. 지식 다음에는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을 뜻하는 절제(節制)가. 절제 다음에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을 뜻하는 인내(忍耐)가. 그다음이 형제 사이의 진솔한 사귐이. 이 모든 노력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국어사전에는 사랑이란 말이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정말 많지만 전 이 간략한 국어사전의 정의가 참 좋습니다. 사랑한다면, 나쁜 말보다는 좋은 말을 더 많이 하여 아껴야 하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도 될 수 있으면 베풀어야 하고, 따뜻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이상적인 신앙인이 좋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은 있지만 강인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왠지 모르게 같이 있으면 마음 편하고 좋긴 한데, 무슨 문제가 발생하여 해결책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에는 약간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있잖아요? 이야기 나누기에는 좋은데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는 없는.
한 오 년 전 부터 잘 아는 형님 소개로 매주일 예배 설교를 귀담이 듣는 한 목사님이 계습니다. 전 듣는 게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눈은 주변 상황에 쉽게 현혹됩니다. 종족보존이란 생명 제2 법칙을 지키기 위해 발달한 공작새의 화려한 깃발이 없는 인간은 값비싼 옷과 향수로 몸을 치장합니다. 사회심리학자들도 이를 증명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상대방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화려한 옷차림과 값비싼 장신구지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이 빚어낸 마음속 넓이와 깊이는 아닙니다. 쉽게 영향받아 오염되기 쉬운 눈을 감으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눈으로 만났던 그 목사님을 일주일 전 미국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집에서 약 삼십 분 떨어진 곳에 있는 한 교회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셨거든요. 참 따뜻한 분이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단호함과 강직함은 이미 예상했었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의 소개로 강단에 오른 목사님은 주변 상황에 휩쓸리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주변 상황에 자신의 마음속 안테나를 같은 주파수로 맞추셨기 때문인지 낯설다거나 새롭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익숙하게 느껴졌고, 푸근했습니다. 한 시간 삼십 분가량 그분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마음이 아팠고, 쓸쓸했고, 고독감이 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분에게서는 어떠한 강함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투명했습니다. 그런데, 광야를 헤매다 당신을 찾아온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함께 살아가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방인에게 전하려고 몸부림쳤던 예수님을 철저하게 따르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이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손해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날 밤 전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을 만났다. 거대했다. 장엄했다. 다양한 삶의 흔적이 가득한 웃음을 가지셨다. 웃지만, 그 웃음 속에는 슬픔과 고뇌, 외로움과 후회, 아픔이 가득했다. 유도장에서 만난 대인Dayn 사부님이 가진 강함에서 우러나는 온화한 웃음, 그래서 그 뒷면에는 한없는 나약함이 표나지 않게 숨어 있는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부족함과 가냘픔, 나약함과 투명함. 그 속에는 무한한 인내로 단련한 힘이 숨어 있었지만 숨겨져 있지 않았고, 원한다면 누구나 언제든 다가와 들어다볼 수 있었다. 묘한 파괴력이 느껴졌다. 그러다, 지렁이 앞에서 주름잡는 내 모습을 느꼈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인사를 애써 외면한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에 달려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채 나약하게 피 흘리고 고함 한 번 크게 지른 후 삶을 마감한 예수님을 우리는 세상을 이긴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신비를 어느 날 불현듯 깨달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신앙인의 강함에 대해 묵상하는 한 주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거하는 곳이 실천이 시작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 안에서는 강력함으로 변한다는 순거짓말 같은 신비가 우리 각자의 일상에서 진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7~8)” 하나님,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떠돌다, 멈춰 선 곳에서 삶도 멈추는 게 우리네 삶이지만, 그런 삶에서 당신을 향해 달려나간 이들이 있음을 오늘 다시 한번 배웠습니다. 세상은 강해져야 평화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약해져야지만, 진정한 나약함 속에서만, 진정한 강함이 샘솟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여 따뜻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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