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주일, 부활절 제5주: 흰색)
제목: 공감 (이광유 목사)
한 주간 잘 지내셨죠? 한국에서는 아주 큰 일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다음 날 바로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소통에 대해 강조했던 대로, 대통령이 된 첫날 출근길에서도 소통하는 대통령임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각종 매체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연기다 작전이라며 비꼬아 보는 시선 또한 적잖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말을 듣고 저 또한 문재인 편 아냐라고 짐작하실 수도 있는데, 전 선거에서 문재인이 아닌 다른 후보를 뽑았다는 걸 밝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민주적 방식으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존대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힘을 모아 원래 있던 대통령을 내리고 새로 뽑아 올린 대통령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국민이 대통령으로부터 바라는 바가 크리라 생각합니다. 잘못을 범한 이전 정권에 속한 사람들의 눈초리는 섬뜸합니다.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이전과 같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권력 남용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고만 있을 국민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통령입니다. 제이티비시 뉴스를 듣는데, 한 기자의 말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광장은 공감하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사람이 모이는 곳은 대부분 권력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장소였습니다. 이제 광장은 소통하는 곳이 되었다는 그 기자의 말이 참 신선했고 가슴 뭉클했습니다. 광장이 서로서로 헐뜯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속 감정을 헤아리고 배려해주는 장소가 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과 영부인, 가족과 함께 일할 사람을 위해 마음 모아 기도해야겠습니다. 동시에 지난 일 년간 광장에 모여 냉정하고 차분하게 인내했던 그 시간만큼 기다려줘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을 하나 바꾸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 아시나요? 몸에 밴 습관이 몸에서 떨어져 나갈 준비를 시작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약 40일입니다. 대통령은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어른이죠. 잘못된 습관이 곳곳에 배어있는 나라 살림을 바꾸는 데는 40일로는 턱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지금까지 제가 한 말과 엮어서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충성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지난주가 어린이 주일이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생각을 이번 주에 함께 나눌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문득 예수님의 가정생활이 궁금해졌습니다. 성경책을 꺼내 예수님의 생애가 그려진 사복음서를 뒤적였지만, 예수님의 가정생활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누군가 세간의 관심을 끌면 어김없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까지 뒤져 어린이 시절 그 사람의 됨됨이를 찾아내잖아요. 안타까운 건 성경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기 예수는 어떠했는지? 어린이 예수는 무엇을 즐겨 했는지? 청소년기에 예수는 부모님께 반항을 좀 했는지? 어른 예수는 마음씨 고운 여자를 만나면 가슴이 설레였는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복음서에 가득한데, 예수님의 삶을 짐작게 하는 구절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46~47)”
예수님이 소년일 때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경 구절입니다.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찾아간 요셉과 마리아는 예배를 마친 후 나사렛으로 돌아가다 소년 예수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서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은 소년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글쎄요.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소년 예수는 율법학자와 제사장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있었죠. 어린아이가 뭘 알아라고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에서 어린아이가 교회에서 배운 걸 아무렇지도 않게 부모님께 말할 때, 깜짝 놀란 경험을 해 보셨다면 순수함으로 무장한 믿음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제 경우는 둘째 아들 미누가 형 지누에게 놀이로 한 시합에서 질 때, 종종 하는 말에서 자극을 얻는데요. 형이 이기고 나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엄마랑 아빠, 형에게 말합니다. “형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긴 사람은 실제로 진 거고, 진 사람이 실제로는 이긴 거야.”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3:31~35)”
홀로 광야에서 사십일 간 생존을 위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음식을 거부한 채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삶에 대해 묵상한 예수님. 그 후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전 예수님이 홀로 광야에서 보낸 사십 일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살면서 무언가를 제대로 잘하려면, 누구나 홀로 광야로 들어가 버텨야 합니다. 그 시간은 고됩니다. 대다수 사람은 이 사십 일에 질려 그동안 해온 걸 포기하고 좀 더 쉬워 보이는 걸 찾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시 도착한 막다른 길은 결국 우리를 똑같은 광야로 이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2:47)”가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사복음서는 한결같이 증명합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분이 들려주는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에게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전 제자들이 귓속말로 예수님께 이를 슬쩍 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을 둘러본 후 말씀하셨죠.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3:35)” 마가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이 어떻게 반응했으리라 생각하시나요? 전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분명히 섭섭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새 몸만 훌쩍 큰 게 아니라 마음 또한 넓고도 깊어진 아들의 뒷모습을 대견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19:25-27)”
아들이 아들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과 송구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시죠? 괜한 고생을 사서 했고 어머니께 짐만 안겨드리고 떠나는 불효자의 슬픔을 읽을 수 있죠? 투표일이 다가오는 어느 날 제 처가 전화통화로 누구에게 한 표를 줘야 할지를 놓고 장모님을 설득하는 걸 엿들었습니다. 사실 제 처는 저 또한 열심히 설득하려 했습니다. 전 제 부모님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온 삶은 지금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풍요 속 빈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였습니다. 제 부모님 세대는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나 유치원에 다니며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떨어야 할 나이에 한국전쟁으로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다시 북으로, 북에서 다시 남으로 피난살이하셨습니다. 잘살아보겠다는 각오 하나로 눈을 부릅뜬 채 재봉틀을 밤새도록 밟으셨습니다. 한국 현대사 책에서 본 이야기는 사실 제 어머니의 삶이었습니다. 잘살아보겠다는 각오 하나로 베트남 전쟁에 목숨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삶 일부분을 팔아 외화를 벌어오셨습니다. 한국 현대사 책에서 본 해외 파병 이야기는 사실 제 아버지의 삶이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는 슬픔과 울음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대한민국을 이끈 지도자의 마지막은 대부분 불행했습니다. 화는 화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간단한 이치. 모르는 이 한 명도 없습니다. 통합과 화해입니다. 홀로 광야에서 사십 일간 씨름한 절체절명의 고독 속에서, 물보다 진한 피를 나눈 가족이란 테두리를 활짝 열어젖히려는 갈등 속에서, 어머니보다 먼저 삶을 마감해야하는 아들의 눈에 맺힌 서글픈 울음 속에서, 예수님이 결심대로 당신이 택한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게 해 준 건 주변 사람의 공감(共感)이었습니다. 투쟁하는 공간이 공감하는 공간이 되었듯이 우리 삶의 공간이 공감하는 곳으로 변하길 기도합니다. 아이들의 말에, 남편의 말에, 아내의 말에, 친구의 말에, 직장 상사와 부하의 말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예수님의 가정생활을 뒤돌아 보면서 공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함께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보다는 마음을 함께 모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공감하며 살겠습니다. 다른 이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조금 더 맞추며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7/06/04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6.06 |
---|---|
2017/05/21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5.22 |
2017/05/07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5.09 |
2017/04/30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5.01 |
2017/04/23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7.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