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 후 제3주: 녹색)
말씀: 요한복음 4:19~30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제목: 벽을 넘어서
한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면서 경험한 삶의 깊이와 넓이를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와 함께 11년째 살고 있습니다. 우리네 마음이 한결같지 않기에 처와 함께 꾸려가는 삶도 한결같지 않습니다.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고, 행복한 순간이 있으면 불행한 순간도 있지요. 이제 몇 주만 지나면 결혼 11주년 기념일이 다가옵니다. 처와 함께 살아온 11년간의 삶을 되돌아보면 한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면서 경험한 삶의 깊이와 넓이를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 바르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한 가지만 제시한다면 다툼의 이유가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다툼의 강도는 확실하게 줄었습니다. 둘 다 쓸데없는 곳에 힘을 쏟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기에 상대방을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돌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그게 더 현명한 행동이란 걸 결혼 생활 11년이 알려주었죠.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만나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하지만 이론과는 판이한 제 삶은 한 인간이 삶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4장은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는 이는 누구나 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거리를 구하러 시내 중심가를 찾아간 사이에 마을 어귀에 있는 한 우물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기르기 위해 우물가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좀 줄 수 있냐고 여인에게 물었고,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라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동문서답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고 한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물을 달라고 구했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리라. (요한복음 4:10)”
예수님의 대답에 주의를 집중해 본 사람은 어리둥절함을 느꼈을 겁니다. 물을 달라는 물음에 물을 줄 수 없다고 답했을 뿐인데, 갑자기 예수님은 정말로 목마른 이는 당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한 여인은 예수님의 의중을 알아채기 위해 짧은 순간에 많은 걸 생각했을 겁니다. 자신이 물을 주지 않겠다는 말에 예수님께서 화가 났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후 다시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물 길어 올릴 도구도 없네요. 이 우물은 깊어요. 대체 어디서 생수를 구하실 거죠? 선생님은 이 우물을 직접 파서 물을 마셨고 자식과 가축에게 먹인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대단한 분이신가요?” 개역 개정 성경은 제가 선생님이라고 옮긴 단어를 “주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제 아셨죠?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 예수님을 비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여인의 마음에는 아랑곳도 없이 예수님은 당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목이 마른다.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을 거다. 내가 준 물을 마시면 그 물은 사람의 몸속에서 영원한 삶을 향해 솟구치는 샘물이 될 거다.” 이상한 말을 연거푸 뱉는 이상한 유대인과의 대화에 짜증이 난 여인은 날카롭게 쏘아붙였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주세요. 그럼 전 더는 목마르지 않을 거고, 그럼 여기까지 물 길으러 올 일도 없겠네요.” “가서, 네 남편을 불러와라.”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서둘러 대답했습니다. “전 남편이 없습니다.”
“그러게. 너에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이도 네 남편이 아니지. 그러니 네가 한 말은 진짜 참말이네.”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이 예언자란 걸 알겠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예수님의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통찰력이었다고. 곧, 예수님은 여인을 딱 한 번만 보고서 남편이 몇 명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니, 꽤 다르게 생각합니다. “다섯 명의 남편”이란 말로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으로써 유대인을 대하는 그 여인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꼬집으셨습니다. 이 갈팡질팡하는 여인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수와 함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 될 수 없는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이 자신의 조상임을 분명하게 밝혔다는 사실에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향해 품고 있는 분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일 수 없었던 사마리아인의 탄생은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나라를 무너뜨린 후, 한 가지 식민정책으로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사람을 이스라엘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넘어와 살면 달랑 몸만 넘어오지 않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풍습,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세계관, 한국인의 종교를 함께 가져옵니다. 같은 방식으로 아와, 하맛, 스발와임 사람이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와 사는 순간부터 그곳에 살던 유대인은 새로운 문화와 풍습, 새로운 사고방식과 세계관, 새로운 종교를 접했습니다. 다른 인종과 결혼했고 자연스레 2세, 3세 이스라엘 민족은 피부색에서, 언어에서, 종교의식에서, 세계관에서 더는 유대인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아시리아 뒤를 이어 기원전 600년 바빌론 왕국이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후 바벨론 왕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던 유대인 43,000명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걸 허락했습니다.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했던 바빌론 포로 유대인은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 같으면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는 이상한 유대인을 발견합니다. 야곱이라는 같은 조상을 두고 있지만, 함께 하기에는 너무나 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 반목과 불화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여인이 말을 잇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당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인이 끝맺지 못한 말은 아마 이럴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조차 제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1~24)"
한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면서 경험한 삶의 깊이와 넓이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태어난 제 두 아들은 자라서도 쌀밥과 김치,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순댓국 없이는 미국에서 살 수 없으리라고 전 확신합니다. 그게 그 아이들이 살아온 삶의 시간이며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형 에서와 화해한 후 새로운 여행길에 오른 야곱이 숙곳을 거쳐 정착할 곳으로 선택한 세겜 땅에서 판 우물,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야곱의 우물인 그곳에서 갈팡질팡하는 믿음으로 힘들어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만든 한계벽을 넘어설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참된 마음이다. 참된 마음이 있는 곳에 참된 영과 진리가 거할 수 있다.” 세겜 땅에 정착한 야곱은 제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 그 장소를 엘 엘로헤 이스라엘el elohe-ishrael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번 한 주에 옮겨 심어 시간과 장소가 쌓아 올린 한계벽을 거뜬하게 넘어서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마음을 찾았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깨달았을 때만,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함께 오늘 나눈 말씀을 새기기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그렇습니다. 뭔가 일 하나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이 짜증은 애써 누르려는 노력과는 다르게 결국 우리를 향한 화, 다른 이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시간과 상황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오늘 예수님은 진심을 찾아 갉고 닦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가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의 진심을 찾아 갈고 닦아 우리를 억누르는 시간과 상황이 우리 앞에 세워둔 한계벽을 넘어서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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