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 후 제5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말씀: 요한복음 21:1~18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제목: 마음의 날개가 펼쳐질 때까지
올겨울 제가 사는 미국 뉴저지 북부 지역에는 딱 세 번 정도 눈이 왔습니다. 첫 번째 내린 눈은 한 이틀 정도 대지를 덮은 후 사라졌고 나머지 두 번 온 눈은 내린 바로 그다음 날 오후에는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습니다.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자연만 이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상도 이상합니다. 옳다고 생각한 게 옳을 수 없는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음을 하루가 다르게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 선거 당시 선언했던 자국 우선주의 외교 및 경제 정책을 전쟁터 한가운데 떨어진 병사의 마음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테러 가능 국가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미국을 떠날 수 없게 되었고 그 나라를 방문한 사람은 테러 위험성으로 인해 미국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 오늘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문제로 변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트럼프 대통령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식의 말은 말장난으로 변할 수 있고, 신경질적인 말장난은 결국 말싸움으로, 말싸움은 다시 몸싸움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화학자 죠셉 캠벨은 종종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은 인류 역사가 시작한 이래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건실하게 잘 살아낸 ‘영웅’은 세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중심부에 뛰어들어 그 속에서 씨름하여 자신을 이겨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을 넘어 서는 일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 21장에는 요한이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만난 순간 느낀 바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그려진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직접 찾아가는데 열심을 다하셨습니다. 빈 무덤을 찾은 마리아에게 직접 나타나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두려움에 싸여 한 집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안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 가롯 유다 다음으로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은 도마가 손가락을 자신의 못 자국에 넣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제자들이 믿게끔 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셨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1장은 그런 예수님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걸 알려줍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다. (요한복음 21:2~3)”최후의 만찬이라 알려진 유월절을 기념하는 저녁 식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며 빵이 당신의 몸, 포도주는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만 먹거리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먹거리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주셨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예수님께서 배고픈 영혼을 어루만져 줄 필요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이끌던 지도자의 부재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배가 고팠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조각으로 수천 명이 배부르게 먹었던 그 순간을 잊었습니다. 아니 잊고 싶었겠죠. 그래서 스스로와 타협했습니다. 제가 사는 드류 대학교 기숙사에는 매 학기 새 학생들이 이사를 옵니다. 며칠 전 한인학생회 개강예배가 끝난 후 4주 전에 결혼한 후 미국에 온 한 전도사님 부부를 만나 인사를 나눴습니다. 고향을 떠나 미국에 첫발을 내디딜 때는 배고픔과 낯섦과 서러움을 이기리라 다짐합니다. 몸의 한계를 넘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겠다고 다짐합니다. 1년, 2년, 3년, 4년.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하면 얼마 못 가 정말 중요한 건 적당하게 좋은 일자리, 특별히 이민자의 삶이기에 신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장, 적당하게 좋은 집, 적당하게 좋은 자동차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베드로와 행동보다 생각이 빠른 도마가 아무런 의견 충돌 없이 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건 사는데 영혼보다는 몸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둘 다 했기 때문입니다.
밤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그물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놈의 기적. 지금까지 우리는 이 기적에만 관심을 두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삶에도 그런 대박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들었고 그러길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까마득하게 잊은 건 제자들은 그렇게 잡은 고기를 다 먹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먹은 건 강가에서 예수님이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과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라고 한 자신들이 잡은 몇 마리의 물고기였습니다.
육지에 서 있던 남자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베드로답게 벗어 놓은 옷을 황급히 입은 후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배로 가나 헤엄쳐서 가나 비슷했던 거리를 성급한 그는 생각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제자에게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란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성급하지 말라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가라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면 반석처럼 그 자리를 지키라고.
예수님이 손수 준비한 구운 생선과 빵을 먹을 때, 제자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 제자들이 무척 부끄러웠을 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서로 보좌하겠다고 다투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몸이 아닌 영혼을 향한 삶의 중요성을 흠모했지만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을 다시금 강가로 몰고 간 배고픈 배는 사실 배고픈 마음에서 비롯되었음도 몰랐습니다. 이른 아침 강가에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만 들렸습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예수님과 제자들은 말없이 생선과 떡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침묵을 깨고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다시 시몬에게 건네셨고, 시몬도 같은 말로 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잠시 후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한번 더 하셨습니다. 근심에 싸인 시몬은 성급하게 말하는 걸 멈추었습니다. 드디어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꼽씹은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리하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가 제일 먼저고 그다음은 “내 양을 치라.”며, 마지막이 “내 양을 먹이라.”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를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8)”
어린 양은 주린 배로 힘든 우리입니다. 주린 배는 채워야 합니다. 하지만 배가 부른 후 찾아오는 배고픔은 영혼의 배고픔입니다. 목자의 인도를 따라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야지만 영혼의 양식을 찾아 먹을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몸이 예전 같지 않아지는 과정이죠.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주린 배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린 배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주린 영혼에 사로잡혀야 함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자괴감과 박탈감, 열등감을 극복한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 곧 영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죠. 재산과 명예, 권력을 피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면 이 세 가지에 사로잡혀 질질 끌려다니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네요. 예수님을 따른다는 거. 이리도 힘든 일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육체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영혼에 대한 진리를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하나님,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하는 장면을 읽으며 오늘 우리가 꾸려 가는 삶의 모습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먹는 거, 마시는 거, 입는 거. 이 세 가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삶을 이 세 가지를 위해 꾸려갑니다. 몸의 배고픔 때문에 쪼잔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쪼잔해지고 영혼의 배고픔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여 오는 배가 우리를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오늘 다시 한번 영혼의 배고픔을 느껴야 몸의 배고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번 한 주 영혼과 몸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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