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 후 제2주: 녹색)
말씀: 누가복음 12:15~21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제목: 욕망(欲望)에 잡아먹힌 이
작년에 개봉한 <<대한민국 정부 부정부패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 재밌다고 합니다. 이미 대중에게 알려진 문제 뒤에는 역시나 또 다른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습니다. 혹자는 이 때문에 작년 후반기 극장가 매출이 뚝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의 근거가 결국에는 현실임을 오늘 대한민국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달 넘게 한국 제이티비시 뉴스를 보지 않았습니다. 보면 볼수록 화가 치밀었고 그렇게 쌓인 화에 짖눌려 이유 없이 처와 아이들의 행동이 맘에 거슬리게 느껴졌습니다. ‘아차! 이건 아니다. 아이들과 처랑 사이좋게 지내는 게 괜한 뉴스를 보며 불쑥불쑥 샘솟는 화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훌쩍 한 달이 지난 후 이 주 전부터 다시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국회 청문회에서 ‘모르쇠’로 일관했던 재벌 기업 총수들과 박근혜 정부의 두목 최순실 씨 사이 오고간 비자금과 뇌물에 관한 증거가 하나둘 국민에게 공개되고 있었습니다. 밥을 급하게 먹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급히 먹으면 체하니까 천천히 먹으라고 당부합니다. 아주 어릴 때 배운 ‘느림’이란 처세술인데, 어느새 우리는 이 소중한 느림을 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을 분노케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먹으려다 결국 체한 사람들입니다. 욕망을 따라 열심히 살았는데, 뒤돌아보니 욕망에 잡아 먹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잘 살려면 욕망을 제거하고 마음을 비우며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말은 쉽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게 욕망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가는 삶에서 무언가가 빠졌다고 생각하는 거 욕망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유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의 원동력이 되는 욕망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갓난아기는 세상에 나온 순간 의사 혹은 다른 이의 손바닥이 찰싹하며 때린 엉덩이가 아파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 울음의 진짜 의미를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엉덩이가 아파서 울었기에 인간 삶의 시작은 아픔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그동안 살았던 엄마 자궁이 그리워서 나는 울음이기에 인간 삶의 시작은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전 아픔과 그리움도 욕망이 있기에 가능한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 없는 삶,욕망 없는 삶은 의미를 상실한 삶입니다.
성경책도 인간 삶의 시작을 욕망에서 찾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성경 속 에덴동산을 엄마의 자궁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인간 삶의 시작을 엄마의 자궁으로부터의 추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책을 심리학적 틀로 읽을 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생각하는데, 천국을 생각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장소가 바로 엄마의 자궁입니다. 자궁만큼 태아에게 안전한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미숙아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보육기(保育器; incubator)는 엄마의 자궁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서 쫓겨난 원인은 욕망입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게 갖추어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욕망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성경 속 인물 중 욕망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두 명 있습니다. 야곱과 가롯 유다. 한 외경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고 아낀 제자라고 기록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아낀 제자이기에 가장 하기 힘든 일을 시켰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가롯 유다는 동전 삼십 개를 받고 예수님을 유대교 지도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보통 누군가를 경찰에 넘겨주면 법정에 나와 증인으로 진술은 해야 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죄를 판별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미국으로 공부하러 오기 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목사님과 교수님을 찾아가 인사드릴 때,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목회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교인은 다름 아닌 가장 가까이 있는 교인이다.” 당시에 전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나이에 가까이 다가가니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까운 만큼 상호간에 더 많은 기대와 책임이 요구되기 때문에 약간의 틈만 생겨도 한순간에 와장창 무너져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숨어 있는 가롯 유다를 차분하게 발견해 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와 비교할 때, 야곱은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니죠.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서 직접 그걸 쟁취했죠. 야곱은 철저하게 욕망에 집어 먹힌 우리를 상징합니다. 그는 자연의 순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천운(天運: 하늘이 내린 도리)이라고 하죠? 야곱은 이 천운을 인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형 에서를 위한 아버지 이삭의 축복 기도를 훔쳐 달아난 건 당연한 일입니다. 외삼촌 라반 밑에서 수십 년간 일한 야곱은 지금 우리가 유전자 공학이라고 부르는 수법을 사용하여 재물을 축적합니다. 하지만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욕망도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형 에서가 자신을 해치리란 걸 알았지만, 자신이 삶을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 강가를 홀로 배회할 때 찾아온 천사와의 씨름은 야곱의 마음속에서 진행 중이던 갈등과 번뇌가 폭발했음을 상징합니다. 마음속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주장했죠. 사기꾼 야곱. 그리고 그런 자신을 꾸짖는 또 다른 야곱. 그날 밤 야곱은 자신의 마음속 그 힘의 끝을 알 수 없는 욕망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과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한 씨름에서 이겨야 합니다. 여기서 씨름은 육체적 대결 혹은 결투가 아니란 걸 명심해야 합니다. ‘씨름’은 마음속 욕망을 이기기 위해 우리가 하는 갈등과 번뇌입니다. 야곱은 욕망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에 비로소 형 에서를 만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욕망을 쫓는 여행이 아닌 욕망을 버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실세(實勢) 최순실 씨가 생각났습니다. 대한민국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그녀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12장 속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와 비슷합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 네 영혼을 내가 도로 찾아 갈 건데, 그러고 나면 네가 지금까지 이룬 이 모든 게 대체 뭐가 될까?” 지금 여기에 모인 우리가 최순실 씨가 이루어 낸 그런 엄청난 힘과 부를 맛볼 수는 없겠죠. 하긴, 저 역시 그런 상황에서의 삶은 어떨할 지가 궁금합니다. 그런 부와 명예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 쓴다고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지금 우리 형편에 감사하고,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우리만큼 존중하며 위하며 살아가기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는 법을 잊어버렸을 때,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는 모든 걸 손에 넣었지만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을 잃어버린 부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누가복음 12:26~30)” 이번 한 주 우리 자신과의 씨름에서, 우리 욕망과의 씨름에서 지지 않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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