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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8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12. 1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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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절 제4주: 보라색)




말씀: 마태복음 9:32~38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잃어버린 신비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 한 주 잘 기다리셨습니까? 잘 풀리지 않는 일 어떻게든 억척스럽게 해결하려고 달려들기보다는 시간이 약이겠거니 생각하며 한 번 큰맘 먹고 기다려보셨습니까? 전 그렇게 잘 기다린 한 주가 아니어서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특히나 마태가 기록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종교 지도자의 특별한 능력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의 인격을 유심히 살펴라. 설교자가 누구인지와 미사여구로 가득한 설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여 주머니를 털게 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는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현대인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한 성경책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한 해 두 해 흘러갈수록 설교 시간 해야 할 말에만 점점 더 신경 쓰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면 목회자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주 전부터 제 집안에는 참 오랜만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오래간만에 처와 신경전을 벌였거든요.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뭐 특별하고 중대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잠깐 마음속에 품었다가 다시 흘려버렸으면 될 생각 하나가 집착하면 할수록 점점 커져 절 짓누르더니 저 바닥 아니 땅속까지 절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럴 때면 사소한 일상이 굉장히 무게감 있게 다가옵니다. 아이들이 학교 다녀와서 노느라 바닥에 던져 놓은 가방을 보면 이러다가 이 녀석들이 커서 대체 무엇이 될까?’란 극단적인 상상에 빠지게 됩니다. 아이들 돌보느라 종일 대기조로 살아가는 처가 커피를 마신 후 설거지통에 넣지 않고 책상 위에 남겨두면 아니, 이 여자는 이렇게 뒷손이 없어서 앞으로 대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한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놀라운 건 푹 쳐져 느려진 제 삶에 대해서 전 무척이나 관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들의 조그만 잘못에서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거야 원 뭐가 되려나고 비판하지만, 제가 하는 잘못에는 몸이 안 좋아서, 어젯밤에 잠을 잘못 자서 그렇다는, 등의 다양한 핑계로 정당화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정말 많은 기적(奇蹟)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배를 타고 당신의 고향으로 들어가셨을 때, 하반신 마비로 고생하는 한 남자가 들것에 실려 예수님께 옵니다. 그의 믿음을 본 예수님은 평안해라.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죠. 옆에 서 있던 서기관들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신성모독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하자, “죄 사함을 입었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라는 말 중 어느 게 더 쉬운 말이냐?”고 되물으셨죠. “하나님의 아들딸은 땅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여 말씀하시더니 들것에 실려 온 남자를 향해 일어나서 네가 실려온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정말로 일어나 자신이 누워있었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혀 인간에게 이런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 후 길을 가던 예수님은 세금 창고에서 그날 세금을 세는 마태를 본 후 나랑 같이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해가 저물자 예수님은 세무서 직원과 죄인들이 가득한 장소로 찾아가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저녁을 드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곳까지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한평생 신앙생활을 삶의 기준점에 두고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예수님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지만, 그 말을 듣고 있으면 괜히 낯이 뜨거워지고, 진보 같으면서도 보수고 보수 같으면서도 진보인 예수님의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거죠. 엘리야 선지자 같이 죽은 이를 살리고 바다와 바람을 잠잠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을 살아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냥 궁금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잊고서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가득한 장소에 들어갔던 거죠.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궁금했습니다. 광야에서 금욕과 고행을 통해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고 배운 이들에게 생의 즐거움을 찾아다니는 예수님은 낯설었습니다. 자신의 스승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의 풀어진 신발 끈을 다시 묶어주는 일 말고는 예수님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녁 식사 중인 예수님께 한 회당장이 다가와 조금 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딸을 좀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회당장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상종하지 말아야 할 죄인들이 가득한 장소에 직접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는 12년째 백혈병에 걸려 고생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회당장과 함께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과 믿음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을 살려낸 예수님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이제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남자가 예수님을 따라오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기록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두 남자에게 예수님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이 세상을 지배할 미래의 왕,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두 남자의 눈도 뜨게 해주셨습니다. 눈을 뜨게 해주는 유일한 조건은 네가 진정으로 바란다면혹은 네가 바라는 대로였습니다. 그런 후 그들에게 절대로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은 귀신에 사로잡혀 말문이 막힌 사람을 만나 그의 입을 열게 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걸 예수님 곁에서 지켜본 이는 크게 두 가지 부류의 사람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평범한 사람 곧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대중입니다. 예수님의 신비로운 행위를 지켜본 대중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난 이스라엘에 살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본 적이 없어!”라고 경탄했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기득권을 소유한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특권을 지닌 이들은 예수님이 일으킨 다양한 이적을 직접 관찰한 후 악마와 결탁을 맺었기에 가능한 일이다.”고 간단하게 결론지었습니다.


      사회에서 기득권을 소유한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내린 평가를 들은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곳곳을 찾아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기득권을 박탈당한 평범한 대중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셔서, 가르쳤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셨고, 몸과 마음이 아픈 이를 고치셨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다니던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해야 할 곡식은 많은데, 이 곡식을 거두어들일 일꾼은 적구나. 하나님께 일꾼을 보내달라고 부탁해라.” 자본주의에 길들어져 돈맛에 따라 모든 걸 평가하는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추수는 곧 수입이라는 공식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서 추수라는 단어로 표현하려 하신 건 누군가 다가와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슬픔과 원망, 분노와 좌절을 거두어 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꾼은 다른 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일꾼이 추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면 신비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신비가 사라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날 힘을 빼앗긴 사람에게 그럴 힘을 불어 넣어주고,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사람의 막힌 입을 열어주고,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해 헤매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해서 걸어가야 할 길을 보게 해 주는 일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깨달음이라고 감동이라고 표현하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새로운 의미를 마음속에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지막 한 주 바리새파 사람처럼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비를 애써 못 본 척 합리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신비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 움직일 힘도 없는 갓난아기 속에서 우리가 살지 못한 또 다른 삶에 대한 희망과 신비를 발견하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비로운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다음 주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아기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성탄절이 오지만, 한해가 끝나고 또 다른 한해가 시작하지만, 우리 마음은 무덤덤합니다. 왜 이렇게 무덤덤할까 궁금했는데, 당신께서 우리 삶에 가득 수놓은 신비를 바라보는 눈이 막혔고 이를 향해 걸어가는 다리가 마비되었고,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리화하는 우리 생각 때문이란 걸 알았습니다. 이번 한 주 당신의 탄생을 기다리며 신비로 가득한 우리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잘 생각하여 느끼고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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