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태복음 2:19~23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다양한 기다림
강림절(降臨節), 대림절(待臨節)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4주, 그러니까 한 달을 일컫는 말입니다. 아기를 낳는 경험을 가져본 여성은 알고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은 그저 기다림입니다. 자궁 속 아기가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엄마의 몸은 아기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골반 관절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온몸을 지탱하는 기둥에 해당하는 등뼈가 약해집니다. 성경책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다른 민족이 받게 될 벌의 강도를 종종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셨습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죽었다가 살아나도 경험할 수 없는 고통인데, 이 해산의 고통은 제 처의 말을 따를 때 “골반 아래가 몸에서 따로 떨어져 나가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마취제 없이 우리 몸을 두 조각으로 베어낼 때 느끼는 고통이 해산의 고통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끔찍한 고통을 안기는 해산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다림 말고는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다림. 현재 한국의 불안한 정치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어린아이조차 냉정하리만치 정확하게 잘 알고 있는데, 그놈의 법이 무엇인지! 똑똑한 사람은, 국민이 부여한 권위를 겸허하게 사용하지 않고 그걸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하게 무장한 사람은 모든 이를 위한 법을 자신의 법으로 바꾸어 법망을 교묘하게 이리저리 피하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바른 게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된 오늘, 대한민국 국민이 할 수 있는 건 ‘기다림’입니다. 이 시점에 필요한 기다림은 망각을 거부하고 타성을 몰아내는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은 따뜻함으로 무장한 냉정함으로 국회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해 마음에는 없는 대한민국 남아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대 가서 수도 방위군 혹은 전투경찰이라는 이름 아래 대통령과 기득권 세력 집을 지켜주는 일을 맡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촛불 집회. 비폭력저항의 물결로 매주 새로운 집회 문화를 창조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간절하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린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렇죠. 가장 간절하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린 사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록을 남길 때,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요셉의 존재를 강조했다면 누가는 마리아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다니엘에게 나타나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알려줬고, 제사장 스가랴에게 나타나 아내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하리라고 예언했던, 천사 가브리엘은 청년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리송했던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만나러 갔는데, 달려오는 마리아를 본 엘리세벳의 뱃속 아기는 기뻐서 힘차게 발길질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내린 인구조사를 위해 남편 요셉의 본적인 베들레헴으로 갔을 때, 마리아는 아기를 낳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들레헴으로 몰려왔기에 머물 곳이 없었고 결국 여관의 마구간 한쪽을 빌려 강보에 싼 아기 예수를 구유에 눕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목동들이 찾아왔습니다. 밤새 양 떼를 지키는데 하늘에 천사가 나타나 이곳에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이에게 경배를 드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랍니다. 그 후 팔 일째 되는 날 아기 예수를 할례받게 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한 남자는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를 거의 빼앗다 싶어 앉아 들더니 하나님을 찬송하며 “이제는 하늘의 구원이 땅에 임한 것을 보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다!”고 외쳤습니다. 아기 예수를 향한 엄마 마리아의 기다림은 감격과 희망의 기다림이었습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신비로운 일이 하나둘 아귀가 맞추어지며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걸 확인하는 가슴 벅찬 기다림이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헤롯 왕은 마리아와는 전혀 다른 기다림으로 밤잠을 설쳤습니다. 어느 날 동방에서 찾아온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베들레헴에서 왕이 태어났다며 찾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은 자신인데,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 반역자가 탄생했다는 말에 헤롯 왕의 간담은 서늘해졌습니다. 동방 박사들을 극진히 대접한 후 떠나보내며 말했습니다. “왕이 될 아기를 발견하면 반드시 나에게도 알려주시오. 나 또한 한달음에 달려가 새 왕에게 경배를 할 것이니.” 하지만 동방 박사들은 다시 헤롯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눈치챈 헤롯은 그 옛날 이집트 왕이 했던 것과 유사한 정책을 생각해냅니다.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사내아이 중 두 살 미만은 모두 죽이라고 부하에게 명령했습니다. 두 살 미만 사내아이가 베들레헴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헤롯 왕은 기다렸습니다. 무척이나 긴장했을 것이고, 긴장감으로 인해 부하들이 일을 제대로 잘 처리하지 못하면 버럭버럭 화를 냈을 겁니다. 헤롯 왕은 기다렸지만 사실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자기 뜻대로 이루길 원했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헤롯왕은 기다림에 반행했고, 결국 기다림에 잡아 먹히고 말았습니다.
아기 예수가 자라나 말문을 연 후 아빠라고 부르며 부지런히 따라다녔을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요셉을 말수는 적지만 사려 깊은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배가 불러오는 걸 본 후 그 당시 모세 율법에 의지하면 얼마든지 마리아를 혼쭐낼 수도 있었지만, 요셉은 마리아의 장래를 걱정했다고 마태는 설명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문제에 달려들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란 듯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약혼자 마리아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날 밤 천사가 꿈에 나타나 진실을 말해줬습니다. 꿈은 참 신비로운 현상입니다. 전 심리학을 공부하기에 그리고 서서히 공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꿈을 경험하고 있기에 꿈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성에 정지신호를 보내면, 감성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요셉은 심사숙고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난 거 같습니다. 그날 이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는 날까지 함께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한 본심은 알 길이 없지만, 그가 그런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그 또한 천사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고, 헤롯은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려고 노력한다는 소식을 듣자 요셉은 다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묵묵하고 성실했던 그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짐을 꾸려 결혼 후 고생만 시키는 거 같아 미안해하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나귀에 태운 후 길을 떠나 이집트로 갔습니다. 헤롯 왕이 죽자 천사는 다시 요셉의 꿈에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해줬지만, 요셉은 걱정했고 천사는 꿈을 통해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로 가도록 도와줬습니다. 요셉의 기다림은 준비하는 기다림이었습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노심초사했고, 앞으로 내딛은 한 걸음이 불러올 변화에 심사숙고하며, 변화로 가득한 자신의 삶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강림절입니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라는 기다림을 공부하고 훈련하고 배우는 시간입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다림은 주변 사람을 향한 기다림과 똑같아야 합니다. 폭락한 주식값이 다시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아뢴 후 우리는 기다립니다. 사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지요. 하지만 음식집에서 주문한 음식이 5분 만에 나오지 않으면 음식집 서비스의 질이 형편없다고 비판합니다. 아픈 몸을 낫게 해달라고 아뢴 후 우리는 기다립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우리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아이들의 장난과 주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절대로 기다려주지 않고 한 방 먹었으면 두 방 먹이겠다는 전투적 자세로 달려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 세 사람의 기다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 가지 다른 기다림. 상황에 따라 우리는 이미 이 세 가지 다른 기다림을 삶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하루하루가 신바람 나는 기다림. 우리 뜻대로 되는 게 단 한 가지도 없는 듯 해 모든 게 못마땅하고 모든 게 답답한 짜증과 화에 사로잡힌 기다림. 한 걸음 또 한 걸음 노심초사로 밤잠을 설치지만 묵묵하게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 끈기와 인내의 기다림. 이번 한 주가 예수님을 기다리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 그 자체를 기다리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린 이가 결국 기다려야 했던 건 팔뚝보다 작은 신생아 예수였다는 역설을 오늘 우리 마음속에 제대로 잘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맘조리며 기다리지 않고서는 생명과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도 기다릴 수 없다는 역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기다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기다려야지. 기다려야지. 그러다 못 기다려 화에 휩싸인 우리의 민낯을 직면했습니다. 이번 한 주 진짜 잘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잘 기다린다는 건 물러남도 신세한탄도 도망도 아님을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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