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 왕국주일: 흰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말씀: 요나 1:1~5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제목: 소통장애
하루가 시작하면 의식적으로 뉴스를 찾아보거나 듣게 되는 요즘입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을까란 기대보다는 염려가 몰려와서 그럴 겁니다. 국민의 마음을 잘 대변하겠다고 꿀떡같이 약속했는데, 알고 보니 꿀떡 같던 약속은 이미 철저하게 계획한 연극에 불과했습니다.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난 시민은 의기투합하여 제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우리나라를 보살펴달라고 외치지만 그런 말은 안중에도 없는 거 같습니다. 소통장애. 지금 한국을 이끄는 지도자와 이 지도자를 특별한 의심 없이 뽑은 국민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탄핵과 하야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외치는 또 다른 지도자 집단 또한 더는 쉽게 믿을 수 없는데,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은 원래 역성혁명을 준비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었거든요.
요즘 아이들은 함께 모여서 놀긴 하는데 그게 꼭 노는 거 같지는 않게 논다고 합니다. 누리망 속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누군가를 직접 만나 관계를 형성하기 보다는 가상현실 속에서 관계 맺는 법을 먼저 배우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대여섯 명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노는 거 같긴 한데, 무얼 하나 가만히 관찰하면 저마다 혼자만의 세계 속에 들어가 놀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손전화기 세상이죠. 분명히 한 자리에 있지만 모두 그곳에 있지 않은 만남. 제가 다니는 드류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성인이 된 아이들이 한 책상에 둘러앉아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는 걸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 숨소리를 들으며 관찰하고 이해하며 관계를 형성하는 훈련이 부족하다 보니 요즘 아이들은 취업 면접 시 면접관과 눈 마주치는 걸 무척 꺼린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음속에 담아둔 걸 꺼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보니 공식 석상에서 하는 말도 점점 손전화기 문자와 비슷해진다고 합니다. 한 면접관은 면접은 끝난 후 문자를 보내는 취업 응시생이 더러 있다고 말했습니다. 면접관 앞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걸 문자로 대신 말하려고 그런다네요.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사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누리망. 누리망을 헤매며 여기저기 흩뿌려진 정보를 줍는 재미가 쏠쏠하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화제. 그런데 누리망은 원래 기대와 목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망은 점점 더 넓어지지만,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인 경청과 공감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기와 한가지 정보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이제 조회 수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병적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사진 속에 담습니다. 그리고 자랑합니다. 그런 후에는 틈나는 대로 사람들이 우리가 한 자랑질을 좋아하는지를 확인합니다. 이런 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은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적 소통입니다. 대화 속에서 상대방은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소통장애. 얼마 못 가 소통장애 전문 병원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해보게 됩니다.
성경 속 인물 중 요나 만큼 독특한 사람은 없습니다. 먼저 요나는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실패한 예언자입니다. 의인의 대명사 욥은 처절한 실패 후 부활을 맛보았지만 요나는 실패 말고는 다른 걸 경험하지 못합니다. 요나서 기자의 글을 통해 마음속에 그려지는 요나는 참 무뚝뚝한 사람입니다. 자기 말고는 다른 이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도 귀를 기울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태도와 행동은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본 소통 장애를 대표합니다. 니느웨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한쪽 귀로 듣고 다른 한쪽 귀로 흘린 요나는 다시스로 떠나는 배에 오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혼내기 위해 폭풍을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보낸 폭풍은 요나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댓가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틀어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마련한 폭풍은 자기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는 이기적인 요나와 소통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한 대화법일 수도 있습니다.
한 이 주 전부터 제 첫째 아들 지누의 한 가지 행동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월, 화, 수요일 아침에는 제가 지누와 지누보다 두 살 더 많은 이삭이라는 남미계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줍니다. 이삭은 부모님과 함께 이번 여름에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뉴저지로 이사를 왔습니다. 부모님이 드류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학기가 시작했을 때, 지누는 이삭에게 이것저것도 물어보고 이삭이 하는 말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지누는 이삭이 하는 말에도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학교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마디 말도 걸지 않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지누를 데리고 학교 수영장으로 가면서 제가 물었습니다. “지누야, 너 왜 요즘 이삭이 형에게 한마디 말도 안 하고 형이 무슨 말을 하면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니?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요.” “임마, 그냥이 어디 있니?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너 학교 친구들은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하지는 않을 거잖아. 왜 그러냐?” “학교 친구들하고 말 잘 안 해요.” “왜?” “그냥요. 말 안 하면, 그냥 편해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말수가 적은 저지만 그게 사는 데 그리 좋은 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제 엄마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절 닮아가는 거였죠. 이걸 어쩌나 한순간 망설이다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누야,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단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다른 이에게 관심을 보여야 해…” 지누는 시큰둥하게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수영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전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지누가 제 눈앞에 있었지만 보기 싫다는 듯이 제 할 수영에만 전념했습니다. 수영장 한쪽 벽에 붙어 숨을 고르다 제가 오면 씩하고 웃는 지누에게 철저하게 무표정으로 응답했고, 수영 후 수건을 집어 제 몸을 먼저 닦았을 뿐만 아니라 지누를 기다려주지도 않고 수영장 밖으로 먼저 나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의아한 지누가 황급히 제 뒤를 따라 수영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체육관을 나온 전 이때다 싶어 집까지 냅다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빠가 왜 그러는지 영문도 모르는 지누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겁지겁 쫓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기 위해 세면실에 들어갔을 때 지누를 보고 제가 물었습니다. “지누야, 아빠가 수영장에서 집에 올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네가 하는 말에 대답도 안 하니까 기분이 어땠어? 좋았어?” “아니요. 안 좋았어요.” “혹시 무섭지는 않았니? 아빠가 화난 거 같고.” “네, 무서웠어요. 그런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지누야, 이삭 형이랑 네 친구들은 니가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무서울 거야. 니가 왜 그러는지도 궁금할 거고.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친구를 보면 안녕이라고 따뜻하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할 때면 열심히 귀담아 들어주는 거야. 알겠지?”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른 요나는 뱃속으로 들어갔고 다시 잠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거부했고, 함께 배에 오른 사람들과의 대화 또한 거부했습니다. 뱃속에서 잠속에 빠진 요나와 소통하기 위해 하나님은 폭풍을 사용하셨고, 잠속에 깊이 빠진 요나를 고기 뱃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소통을, 일뱡향이 아닌 쌍뱡향적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 2:2~4)”
요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우리가 하는 기도는 우리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이기적인 요구는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지금 우리는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른 건 아닌가? 뱃속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요나처럼 망상에 사로잡혀 깊은 잠속에 있는 건 아닌가? 요나가 하나님과 처음으로 소통을 시작한 순간은 그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삶은 그리 바람직한 삶은 아닙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과의 소통을, 주변 사람과의 소통을, 우리 자신과의 소통을 시작해야합니다. 그래야 요나가 했던 실수와 실패를 피할 수 있습니다. 쌍방향적 소통은 말함이 아닌 들음으로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들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 떨어지는 단풍의 끝자락을 살피며 우리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에 한 번 귀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주변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쫑긋 세워 진심으로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요? 하나님의 뜻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던 우리의 뜻에 잠시 마침표를 찍는 건 어떨까요?
기도
하나님, 참된 대화를 해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대화가 끝난 후에도 주고 받은 대화에 담긴 한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고맙다 보니 힘이 나는 그런 대화를 해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실패한 예언자 요나를 통해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끝없이 소통하자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대화를 거부한 쪽은 우리란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와 당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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