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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3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11. 1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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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그게 언제인지 아시죠?


      지난 수요일 드류 신학대학교 종교와 사회 분과 박사과정 학생과 교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피자도 준다기에 가서 점심 한 끼도 해결하고 한 일 년 가까이 분과 모임에 참석하질 못했는데, 모처럼 시간이 맞아 잘됐다 생각하며 모임 장소에 갔습니다. 약속 시각에서 5분 정도 지나자 교수님과 학생들이 하나둘 모였습니다. 지난 화요일 밤 드러난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단연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선거가 있기 전에 간혹 주변 사람이 제게 누가 대통령이 될 거 같나요?”하고 물으면 전 트럼프가 될 거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제 대답을 들은 사람의 얼굴 근육은 한 순간 경직됩니다. 그런 후 이어지는 질문은 언제나 ?”입니다. 제가 대답합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이성적으로 미국 시민에게 접근한다면,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시민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10년 넘게 침체 중인 미국 경제난으로 피해를 본 중산층 이상의 백인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불만을 너무 속이 시원하게 말해줍니다.”


      지금 미국 사회에는 트럼프 공포증이 생긴 거 같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비판적인 다양한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었고, 전미 곳곳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 첫째 아들 지누도 수요일 아침에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처음 한 말이 아이씨!”였습니다. 하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이유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자동응답기처럼 말하는 걸 들으며 어린아이들이 나랏일에 대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도 되는 건가란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 정책 논의를 진행하는 사회자가 오늘의 논쟁에서 아이들은 위대한(?)’ 미국 정치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배우게 될 거라고 확신에 차 말하는 거 들으며 과연 그럴까란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가란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어쨌거나 종교와 사회 분과 모임의 결론은 한 교수의 발언으로 인해 한국과 미국은 현재 같은 배에 올랐다는 데로 모였습니다. 두 나라가 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 총체적인 난관에 봉착했다는 거죠. 그렇게 모임은 씁쓸한 웃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한국도 미국도 현재 탈출이 불가능한 덫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사회는 제2의 히틀러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자유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나라가 지금까지 이루어 온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단 한 사람의 고집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전 많은 사람과는 다르게 조금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였죠?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위한 대규모 시민 집회가 있었던 날이? 제이티비시 뉴스에 나온 한 시민이 집회에 참석하려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우리 딸이 자랐을 때, 아빠도 저기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딸 아이가 아빠는 왜 거기 없었어라는 질문을 듣고 싶지는 않아요.” 어제 있었던 시민 집회를 대중매체를 통해 확인하면서, 대한민국 시민 문화에 몇 가지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걸 들었습니다.


      어제 열린 대규모 시민 집회는 시민의 간절한 바람과 희망을 현 정권에 직설적으로알리는 데만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한자리에 모인 시민이 모두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집회를 만드는 게 또 하나의 목적이었습니다. 돌직구라고 하죠? 직설적인 화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며, 모 아니면 도라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군중의 분노 혹은 광기를 표출하는 자리가 아니라, 현 정권의 잘못을 비웃고 풍자하는 다양한 공연을 통해 함께 웃으며 토요일 저녁을 보낼 수 있는 집회를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웃음이 정신건강에 베푸는 가장 큰 이점은 답답하고 짜증 나는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물러나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 곧 여분의 시간입니다. 웃을 때, 급박했던 긴장감이 한순간 사라지는 경험 해보셨죠? 표면화된 문제를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시민의 눈치를 살피며 수박 겉햛기만 되풀이하는 여야 정치인보다 훨씬 앞에, 한참 위에 서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시민 정신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늘의 문제를 극복하여 해결해 나가리라 생각합니다.


      실은 지난 월요일까지만 해도 전 아주 회의적이었습니다. 한 명의 여인이 알고보니 한 집안이었고, 한 집안은 사실 한 조직이었고, 한 조직은 결국 하나의 정권이었죠. 이제는 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이제는 또 무엇에 놀라야 할지를 우리 자신에게 묻기조차 싫은 한국 사회 오늘의 현실은 모든 한국 사람의 희망을 짓밟았습니다. 화요일 아침 일터를 향해 드류 대학교 교정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데, 2016년 가을 단풍의 끝물이 한창임을 알았습니다. 자연은 마지막이 참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그러한 존재는 마지막까지 아름답습니다. 봄에 돋아나 무더운 여름 동안 무럭무럭 자라난 나뭇잎은 자기 삶의 마지막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보냅니다. 자신의 때가 오면 조금도 망설임이 그 마지막을 받아들입니다. 조금 더 나뭇가지에 붙어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옹고집도 부리질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짜고 주변 사람을 속여 자신이 쟁취한 이권을 조금 더 오랫동안 유지하려는 욕심도 부리질 않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그 순간 그 날을 충실하게 살다가 마지막이 오면 미련 없이 떨어져 내년에 태어날 새로운 나뭇잎이 자랄 수 있는 거름이 됩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죽음을 가을 끝자락 낙엽이 겨울을 준비하듯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열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걸어가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제자들을 모두 한곳에 불러 세운 후 말씀하셨습니다. “난 저기 저 예루살렘에서 죽을 거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날 사로잡아 이방인에게 넘길 거다. 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살아있음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순간은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죽음을 깨달아 깊이있게 성찰하는 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이 한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비유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죽음이란 단어를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가 우리에게 던져졌을 때, 우리가 보이는 반응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죠.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람이 예기치 않은 사고로 죽었을 때, 우리는 모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그건 그 사람에게만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아직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언제나 내일이 있다고 굳게 믿기에 오늘 해야 할 일도 피곤한 몸을 핑계 삼아 내일로 미룹니다. 세상에 마지막은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무언가를 하나 붙잡고 끈덕지게 늘어지는 고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싫어지면 저걸 하고, 저게 싫어지면 다시 또 새로운 걸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만을 예고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은 지 삼 일 째 되는 날 죽음에서 부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며 살겠다고 결심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상징하는 희생만이 아니라 희생 너머에 있는 부활 또한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활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힘겹게 준비한 무언가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사흘만 아파하고 예수님처럼 부활하겠다고 다짐하여 실천하는 자세를 전 부활이라 생각합니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하고, 두 번 해서 안 되면 세 번 하고, 세 번 해서 안 되면 네 번 하는 검질김을 통해 부활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부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남긴 흔적처럼 우리 또한 후손에게 의미로 충만한 무언가를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자식을 낳는다는 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부활 행위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죽은 후 흙이 되어 사라지지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건네준 유전자는 계속해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생물학적 부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삶을 마감한 우리를 오랫동안 기억해 줄 누군가를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 묻고 있습니다. 모두가 영원을 꿈꾸며 영원토록 앞으로만 달려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때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기 위해서는 그때가, 우리 각자에게 도래할 그때가, 언제인지를 기억하면서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오늘과 내일, 요즘. 어제에 매달리지도 그렇다고 내일에 매달리지도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삶에는 시작이 있었다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거,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진리인데, 이걸 잊어버려서 삶은 갈수록 각박해집니다. 모두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서 식단을 조절하고, 주름살을 제거하고, 약을 먹어 살을 빼고, 사람과 돈을 사용하며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돈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안달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는 건 잘 사는게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를 거듭 생각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당신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본받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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