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제14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시간이란 마력
북한에서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온 한 산부인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더는 한둘이 아니기에 ‘목숨’과 바꾼 남한으로의 여정에 우리는 이제 무관심합니다. 한국전쟁이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기보다는 ‘빨갱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마음속 적을 향해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무기력함과 분노를 쏘아붙이기에 바쁩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유신체제가 전 남한을 철저하게 통제할 때조차 국민여론조사를 하면 60할 이상의 사람들은 남북한 통일을 대한민국이 이루어야 할 첫 번째 과제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의 젊은이는 더는 남북한 통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서독을 예로 들면서 괜히 무거운 짐 어깨에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북한과 통일해서 한국의 경제가 어려움에 부닥치지 않길 바란다는 우려도 내비친다네요.
괜한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망명한 산부인과 의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남한에 정착한 후 그분이 맞닥뜨린 문제는 역시나 ‘생존’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중산층 이상의 삶을 꾸려나갔지만, 한국에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산부인과 의사 면허증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결국 일일 노동 근로직 말고는 달리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청소부, 공사 현장 인부 생활로 아내를 돌보던 그가 지난주 삶을 마감했습니다. 고층 건물에서 유리창 닦는 일을 하다가 실수로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새로운 삶을 만들고자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정리한 후 미국으로 들어온 한국 이민 1세대의 삶이 생각났습니다. 한국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죠.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좋지 않은 점이 더 많습니다. 가끔 이민 1세대로 사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건 그놈의 영어를 할 수 없어서라고. 틀린 말은 아니죠. 영어로 의사소통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찾으면 결국 일일 노동직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그 의사는 ‘영어 때문에’라는 원망 거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언젠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망명한 후 다시 미국으로 이민 온 한 여자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니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다기보다는 다른 분과 나누는 이야기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자연스레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하는 말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북한 사투리를 섞었습니다. 전 그날 알았습니다. 북한과 남한은 같아도 너무 같은 나라란 걸. 영어는 10년 넘게 공부해도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자리에서 그분의 북한 사투리 중 제가 알아듣지 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용하는 단어는 달랐지만, 억양은 달랐지만, 그분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귓속으로 쑥하고 빨려 들어왔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13장 10절에서 21절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입니다. 귀신 들려 열여덟 해 동안 몸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예수님이 낫게 하자 이를 본 회당장은 안식일은 쉬어야 할 날인데 왜 그런 몹쓸 짓을 했냐고 따졌죠. “야, 그럼, 넌 안식일에는 가축에게 물도 먹이지 않냐?”라고 예수님께서는 날카롭게 대꾸하셨습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뜻을 풀어본다면, “가축을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는 건데, 하물며 하나님의 딸이 열여덟 해 동안 아팠다면 안식일에 고쳐주는 게 뭐가 잘못 된 거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틀렸다고 반문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예수님을 구석으로 몰려 했던 이들은 부끄러워졌고 반대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승리에 괜히 어깨가 으슥해졌습니다. 이를 목격한 예수님은 불현듯 하나님 나라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 한 알과 누룩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비유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다른 형태로 기록된 곳이 마태복음 13장인데요. 마태복음에 그려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강의’라는 형태로 설명하셨고, 제자들이 이를 잘 알아듣지 못하자 따로 불러 특별 과외 학습도 해주셨습니다. 마태가 경험하고 느낀 예수님이 모세 같은 새로운 율법을 만들어 전해주는 영적 지도자였다면 누가는 예수님을 훨씬 친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미리 수업을 준비한 후 제자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그려져 있다면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자연미와 즉흥성이 가득한 선승의 느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전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해주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의보다는 누가복음의 파격적 가르침을 더 좋아합니다.
누가복음 13장은 조금 생뚱맞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생뚱맞은 이야기 속에 예수님께서 깨달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숨어있죠. 어떤 두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제물에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죠. “그래, 그 말은 그 갈릴리 사람이 특별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런 벌을 받았다는 말이냐? 네 말의 논리를 따른다면, 얼마 전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했기에 그런 벌을 받았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께 각기 다른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형법을 생각하면 그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3:6~9)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건 연민(憐憫/憐愍)의 중요성입니다. 그게 그리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리 마음이 넓지 못해 다른 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나 이창동 감독이 회개와 용서라는 묵직한 주제를 기독교 신앙을 통해 물은 영화 「밀양」은 이런 생각의 무례함을 분명하게 고발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조금 더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포도원 지기와 주인 사이에 문제가 된 건 포도원에 심어진 무화과나무입니다. 포도원에 포도 나무가 아닌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가치는 시작부터 빵점입니다. 그래서 삼 년간 참았던 주인이 말했습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이 나무가 눈에 거슬린다. 베어버려라.” 그러자 주인이 아닌 포도원 지기가 대답했습니다. “올해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죠. 제가 거름도 주고 잘 돌보겠습니다. 내년에 오셨을 때도 변변치 못하면 그때는 단호하게 베어버리겠습니다.” 포도원 지기와 주인 중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무화과나무에게 연민을 느낀 이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포도원 지기였습니다. 그는 포도원 지기라는 삶을 통해 연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과 누룩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쉽게 범하는 오류는 성장과 발전이란 마력입니다. 겨자씨 한 알은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하죠. 밀가루 반죽에 골고루 퍼진 누룩은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발효제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놓친게 있는데, 그건 바로 ‘시간의 마력’입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기 위해서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 구석구석에까지 퍼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만 달려가려고 하는 이때 자칫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생각 또한 발전 만능주의 물질 만능주의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시간의 마력’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가 포도원 주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놓인 걸림돌을 없애며 살려고 할 때, 예수님은 독기가 아닌 연민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더위가 쉬지 않고 기승을 부리는 이때에 조금 돌아가고 조금 천천히 나아가는 ‘시간의 마력’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처럼 작아지기도 커다란 나무 한 그루처럼 커질 수도 있는 게 우리 마음밭입니다. 슬픔에 가득한 얼굴에 웃음을 스며들게 할 수 있는 것도 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분노가 가득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우리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겨자씨 한 알이 자라나는 시간 누룩이 마음 구석구석까지 퍼져가는 시간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조금 천천히 조금 느긋하게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허락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6/09/04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6.09.05 |
---|---|
2016/08/29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6.08.30 |
2016/08/14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6.08.15 |
2016/08/07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6.08.08 |
2016/07/31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0) | 2016.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