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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2018)

영화 속에 담긴 현실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9. 3. 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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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제게 1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주셨다. “이게 웬 달러에요?”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손님이 줬는데, 학교 다녀오는 길에 은행에 들러서 환전해서 써라.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아버지는 모범 개인택시를 운전하셨다. 자갈치 시장이 있는 부산 중구 남포동에는 가끔 외국 손님이 아버지 택시에 오를 때가 있었고 한국 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손님은 주머니에 있던 달러로 택시비를 낼 때가 있었다. 그날 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앞에 나타난 은행에 들어가서 1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은행 직원에게 건넸다. 잠시 후 은행 직원은 환전 증명서와 함께 3,000원 정도의 돈을 제게 돌려주었다. 아마도 그때가 1996년이었던 거 같다. 

1995년 3월 2일 미국의 한 경제 전문지는 한국을 홍콩, 싱가폴, 타이완과 더불어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이상적으로 서구화, 그러니까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훌륭하게 완수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한 마리라고 묘사했다. 이듬해 1996년 3월 14일 한국 정부는 국내 실업률이 2% 미만임을 강조하며 1997년에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고 경제 호황기가 펼쳐질 거라고 예견했다. 1996년 7월 21일을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은 세계 11위를 기록했다. 12월 12일에 한국은 경제 협력 개발 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에 가입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의 실제 경제 상황은 국민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랐다. 경제 협력 개발 기구에 가입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97년 1월 23일 재계서열 14위를 달리던 한보그룹 주력사 한보철강의 부도 신청을 시작으로 건국 이래 성장만을 향해 달려왔던 한국 경제 구조는 해변에 쌓아둔 모래성이 밀려오는 파도에 쓸려 순식간에 사라지듯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실한 기초 공사 위에 빨리빨리, 보암직하고 멋들어지게 보이게끔 쌓아 올리기에만 급급했던 한국 경제는 국가 부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국제 통화 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한국 경제가 감당해야 하는 대가는 엄청났다. 갓 세상을 향해 스스로 일어나 나아갈 채비를 겨우 마친 대한민국 경제는 하루아침에 세계자본주의global capitalism라는 무대 위에 발겨 벗겨진 채 올려졌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은 주인공 세 명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 경제 부도 사태를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 주인공은 김혜수 씨가 연기한 국가 부도 사태를 미리 감지한 후 몸과 마음을 다해 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 조장 ‘김시현’이다. 두 번째 주인공은 유아인 씨가 연기한 국가 부대 사태를 역이용하여 떼돈을 버는 전문 증권 투자가 ‘윤정학’이다. 세 번째 주인공은 허준호 씨가 연기한 조그만 그릇 제조 공장을 운영하다 미도파 백화점과 거래를 맺은 후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게 될 위기에 처한 ‘한갑수’다. 이 세 사람이 내린 결정은 위기에 직면한 인간이 택할 수 있을 법한 세 가지 행동 양태를 보여준다. 다가올 위기를 예견하여 어떻게 해서든 최악의 사태는 막으려는 의협심이 있는 사람.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자기 배속 채우기에만 집중하는 이기심만 가득한 사람. 하루하루 살기에 급급해 의협심도 이기심도 없이 불어닥친 위기에 밀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 난 이 셋 중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네 번째 부류의 사람이다. 의협심은 조금 있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나설 용기는 없다. 이기심은 조금 있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을 용기도 없고요. 의협심도 조금 이기심도 조금 있다 보니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슬쩍 다른 이를 밀치고 살아남을 수는 있는 그런 사람. 그게 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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