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기념주일, 성령강림 후 제6주)
말씀: 잠언 21:1~5
(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집에서 하는 순교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순교자기념주일. 이런 날에 제가 해야 할 설교는 뻔합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지금 우리는 오늘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무궁한 발전은 초대교회 성도의 희생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에는 한 가지 오류가 숨어 있습니다. 그건 과거가 현재보다 더 낫다는 판단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안 그랬는데?” “우리 때는 안 그랬다.” “그때가 좋았지.” 기억해야 할 건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살아내야 할 오늘은 점점 더 어려운 시련과 고난의 장소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국어사전을 꺼내 순교(殉敎)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았더니,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했던 서양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선교 가능국으로 결정한 후 밀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할 때 경험했던 박해입니다. 조선왕조가 서구세력을 대했던 정책 다 잘 기억하고 계시죠? 통상수교거부정책. 외국과의 통상과 교역을 하지 않는 정책이었습니다. 한 무리의 역사학자들은 이 통상수교거부정책 때문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무리의 역사학자들은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전 속에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우리 선조들의 자립심과 독립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있을 수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에 대해서 전 그다지 할 말이 없습니다. 전 그저 두 주장을 다 맞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어쨌거나 한국에 밀입국하여 하나님 말씀을 서민들에게 전하다 조선 정부로부터 받은 탄압과 그 과정 중에 생명을 잃은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첫 번째 순교자라면 두 번째 순교자는 일제 식민시대에 생겼습니다. 1937년 일본은 모든 조선의 기독 학생에게 신사 참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를 반대했던 학교는 문을 닫았고 결국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등 조선의 모든 기독교 교단은 존립과 생존을 위해 신사 참배 명령에 순응했습니다. 이때 죽어도 그럴 수 없다고 외치며 일본의 명령에 반항했던 목회자와 성도가 있었습니다. 한 분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게 그분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은 감옥에서 죽었지만, 해방과 동시에 석방된 사람 또한 적잖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한국 기독교는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분열과 대립이 시작됩니다.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 옥살이를 한 옥중 성도와 교단의 생존과 존립을 위해 신사 참배에 순응했던 성도 사이에서 참된 기독교도가 누구인지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을 문제로 놓고만 보면 옥중 성도는 참된 성도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집단인 신앙 공동체의 존속은 결국 그 집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가는데 달려있다고 생각할 때, 신사 참배를 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명맥을 유지한 옥 밖 성도가 남몰래 흘린 눈물과 땀 또한 인정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흑백논리는 머릿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흑백논리를 무작정 현실에 옮기려고 달려들면 억압과 차별의 씨앗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전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순교라고 생각하는 그런 태도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자기는 그러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순교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좀 아니꼽기도 합니다.
2007년 7월에 일어난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생각나시나요? 2007년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 샘물교회 부목사 1명과 신도 22명은 선교 여행 도중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되었습니다. 2명이 살해되었고 사건 발생 후 42일 만에 20명은 살아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에 정부는 탈레반 무장 세력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가는 해외여행을 자제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습니다. 23명 선교단이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에는 공항 벽면에 붙은 현수막이 담겨 있는데요, 바로 탈레반 활동 지역 해외여행 자제 요청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해당 교회 담임 목사는 주일 설교에서 두 사람의 희생을 극찬하며 이들의 순교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제 2, 3차 아프가니스탄 선교단을 꾸려서 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한 기자가 회견장에서 물었다죠. “목사님도 같이 가실거죠?”
이제 우리는 순교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야 합니다. 죽음을 무릅쓰는 극단적인 행위를 순교라고 손뼉 치며 칭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포기하지 않으면 순교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을 냉정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옆에 친구가 생각지도 않은 장난을 걸어올 때면 쉽게 내뱉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죽을래?”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서양에서는 누군가 기침을 하면 여기저기서 “하나님이 축복하실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아느냐고 친구에게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그냥 사람들이 그러니 자기도 그런다고 답했습니다. 이 말이 생긴 이유는 6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입니다. 피 섞인 헛기침은 흑사병의 전조였기에 이를 본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을 예견하며 해 준 말이 “하나님이 축복하실 거예요!”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 사람의 입에 찰떡같이 붙어 있는 ‘죽음’이란 단어를 설명했습니다. 일제 식민시대와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한국 사람에게 죽음은 더는 낯선 터부의 대상이 아닌 이상하게 친근한 대상이 되었다는 거죠. 한국 교회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교회의 능력을 해외 선교 여행과 선교사 수로 과시하려는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도 ‘죽음’에 무감각한 순교가 숨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에서 순교의 대명사를 찾으라면 모두가 한결같이 예수님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멋진 인생은 순교하는 인생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점 알고 계신가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내실 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면서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속에 품으며 순수하게 대하며 살아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욕망을 내버리면 그럴 수 있습니다. 욕망을 내버리는 건 무엇일까요? 한순간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우리 마음속 온도를 측정하면서 살고자 노력하면 욕망을 내버릴 수 있습니다. 욕망 내버리기의 극한은 자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 중 가장 원초적이고 기초적인 게 생명욕이거든요.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버려서 보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보고 그 본 바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건 이미 ‘순교’하는 삶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잠언서 20장 1~5절은 순교하는 삶의 기준점이 될 수 있습니다. 행위나 행동보다는 마음을 감찰하는 하나님. 당신에게 드리는 제사보다 우리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걸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님. 높은 눈과 교만한 마음, 악인의 형통함을 죄라고 생각하는 하나님. 조급함이 아니라 부지런함을 곱게 봐주시는 하나님.
내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하여 집을 나서는 아버지는 이미 순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남편을 위해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이미 순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순교하는 부모님을 보며 자라난 아이가 해야 할 바를 알아서 하나둘 잘하고 있다면 그건 순교의 삶입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하지만 손안에 있는 오늘을 붙잡고자 노력하는 여러분 모두는 이미 순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우리의 순교하는 삶에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평화가 넉넉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버티기도 힘든 우리의 일상이 실은 순교자의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다며 괜스레 늘어졌던 어깨에 힘을 주고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의 삶을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순교하는 맘으로 잘 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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