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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3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7. 8. 1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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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기념주일, 성령강림 후 제10주: 녹색)



말씀: 출애굽기 20:1~21

(20) 모세가 백성에게 일러주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신 것이다. 너희로 하여금 하느님 두려운 알고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제목: 시작 (이광유 목사)


지난주에 뉴욕 북부 지역의 한인들이 모여 세운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영어 목회 담당자로 부임하여 교우님들께 첫인사를 드렸습니다. 교우님들이 어떤 사람인지, 착한지 나쁜지, 성격은 거친지 온순한지, 제가 그분들을 궁금해하는 만큼 그분들 또한 제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하셨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한민족 핏줄에 대한 집착이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말을 많이 하죠. 세상만사는 연줄에 달렸다. 누구를 알고 있는지, 누구와 혈연, 지연, 학연으로 만들어진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어떠한 삶을 있는지가 결정된다는 말이죠. 2007 미국에 처음 왔을 , 한국의 혈연, 학연, 지연 관계에 기반을 삶은 더는 삶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보다 혈연, 학연, 지연 관계에 따라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는 걸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꼽으라면 다인종이 모여 이룬 미국 사회의 다양성 말할 있습니다. 인종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나라에 모여 살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를 없고, 그로 인해 신뢰에 근거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대중매체를 접하면 다양성이란 말만큼이나 자주 듣는 말이 관용입니다. 단어를 마음속에 품지 않으면 같은 점이라고는 거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가 어렵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자. 좋은 말이죠.


심리학을 공부하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히는 싫어합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편견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술이라고. 익숙하지 않을 접할 때마다 마음속에 생겨나는 불안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편견을 사용합니다. 모르는 대상이 나타나면 알고 있는 대상을 떠올려 공통분모를 찾으려고 하죠. 비슷하면 우리 , 다르면 나쁜 . 이런 편가르기를 통해 우리는 안정감을 되찾습니다. 불안함.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을 밟고 있다는 말하는 신체 현상입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책을 읽으면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있습니다. 아브람, 이삭, 야곱과 요셉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기 위해 그들은 순간까지 살아온 삶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포기라는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려면 가지고 있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직업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75 나이에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 아브람은 집을 떠났지만, 빈손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지고 떠났습니다. 조카 롯을 포함하여 자신의 가족, 가축, 노예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포기한 그때까지 자기의 삶을 이끌었던 인생관이자 세계관이었습니다. 75 아브람의 삶은 괜찮았습니다. 원하는 뭐든 있을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돈이 모든 해주는 시대에 사는 우리의 눈에 아브람은 이미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마음속 한편이 허전했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순간에 만족할 , 우리는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싶지 않지요. 아브람은 정말 일에 도전했고, 그로 인해 그의 삶은 송두리째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첫발을 내딛자마자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여행을 통해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변했습니다. 이미 존경받는 아버지가 수많은 나라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아브라함이 이룬 업적은 우리 속담 하나가 요약해 줍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20장을 읽었습니다. 조금 분명하게 말하면, 어떤 타협도 없이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십계명을 읽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시대에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 기독교인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현실적으로 말해, 여러분께서 십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건 여러분은 아직 제법 괜찮은 기독교인이란 표시입니다. 왜냐면 지금 대다수 기독교인은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거든요. 십계명을 이해는 하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그럴까요? 십계명은 이제 오래된 구닥다리 종교법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십계명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의 주제는 개인의 하나님이 집단의 하나님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은 그런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은 처음으로 무리를 이룬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 생활에 관해 관심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역사가 요셉의 안내로 이집트로 이사한 야곱의 후손들로 시작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홍해에서 구원자이자 갱생자인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이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올려진 최초의 찬양은 누가 불렀는지 아십니까? 성경에 기록된 번째 찬양은 홍해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부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뒤쫓아 오는 이집트 군대를 홍해 바다에서 완전히 멸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은 말로는 표현할 없을 만치 들떴습니다. 기분이 좋은 어린아이들이 자연스레 껑충 걸음을 걷듯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몸은 노래에 맞추어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인생관을 바꾸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이 지켜야 여분의 음식을 저장하지 않기였습니다. 범죄의 시작이 음식을 저장하는 행위와 관련 있다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분의 음식을 혹은 돈을 어딘가에 보관하면, 순간부터 그걸 지키기 위해 낯선 사람은 도둑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만나와 메추라기와 더불어 하나님은 목마른 이스라엘 민족에게 물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과 물에는 어떤 향신료도 방부제도 없었습니다. 환경 호르몬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문명국인 이집트에서의 삶을 이스라엘 민족은 포기했고, 가장 원시적인 , 하늘이 내린 음식을 하루하루 그날 먹을 만큼만 먹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의 흐름에 동화하는 삶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에서 구출한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자기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호렙 산에 이르렀을 ,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야, 이제 내가 너희들에게 다른 이와 더불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기 위해 마음속에 새기고 지켜야 계명을 주겠다. 내가 주는 계명을 받을 있도록 사흘 동안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해라.” 사흘 하나님이 모세에게 번째 계명이 너희는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말라.”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구절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였습니다. 십계명은 무리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위해 지켜야 최소한의 실천 윤리입니다. 십계명의 시작은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백입니다. 십계명의 마지막은 하나의 공동체에서 조화롭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지금 순간 우리 손안에 있는 이외의 사람과 물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십계명을 근본 토대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이끄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아는 손쉬운 방법은 호렙 산에 임재한 하나님을 멀리서 지켜본 이스라엘 민족의 반응에서 찾을 있습니다. 호렙 산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두려워 온몸을 떨었습니다. 삶에서 아무리 우리가 애쓰고 노력할지라도 어쩔 없는 부분,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고백은 삶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집니다. 이집트 파라오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신의 첫째 아들의 이유 없는 죽음이었다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그와 동시에 우리의 나약함을 고백할 때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를 생각할 있습니다. 이웃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이웃에게 너무 많은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십계명 가지 계명을 모퉁이돌 삼아 신앙 공동체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합시다. 그런 후에는 우리 이웃을 질투하지 말고 받아들입시다.


 

기도


하나님, 오늘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까지 십계명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오래된 종교법이라 우리 삶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십계명이 우리 각자의 삶에, 이웃과의 관계에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하지 않음에서 평화가 시작할 있음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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