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제3주: 흰색)
말씀: 히브리서12:4~12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제목: 포기냐? 훈련이냐? (이광유 목사)
지난 월요일에는 제가 4년째 학생을 가르치는 블랜튼-필 상담학교에서 한국어 과정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블랜튼-필 상담학교는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책을 쓴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과 스밀리 블랜튼 정신의학 박사님이 1937년에 세운 정신 상담 전문학교입니다. 2004년에 한국어 상담 과정이 만들어졌고 그 역사는 오늘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이번 학기에 전 졸업을 준비하는 2학년 학생들에게 중독이란 주제를 한 학기 동안 가르쳤습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 중 저보다 어린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전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고 학생들은 절 교수님이라고 부릅니다. 4년째 가르치다 보니 이제는 길을 가는데 누가 교수님 하고 부르면 뒤돌아볼 정도로 이 존칭에 익숙해졌습니다. 어쨌거나 그날 제 수업이 이분들이 졸업 전에 듣는 마지막 수업이다 보니 시작부터 학생들의 주의는 상당히 산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담긴 수많은 종교 윤리를 딱 두 마디로 정리하셨죠? 네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서 힘이 남으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무나 간단한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지키기 힘든 게 이 두 가지 실천 윤리입니다. 그래서 전 제 나름대로 두 가지 차선책을 만들어 놓고 생활합니다. 사랑할 수 없다면 적어도 미워하지는 말자가 그 첫 번째라면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없다면 적어도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게끔 요구하지는 말자가 두 번째입니다.
수업을 간략하고 간결하게 진행했습니다. 예상대로 삼십 분 일찍 준비한 수업 내용을 모두 가르치고 나니 더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지식이 경험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는 이럴 때 나옵니다. 4년째 가르치다 보니 가르침보다 중요한 게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거의 모두 진심으로 상담 공부가 하고 싶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낯선 나라에 들어와 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만 적응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미국은 한국과는 다른 나라이기에 이방인인 이민자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미국 정부가 인정하는 합법적인 이민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에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합법적으로 미국에 체류해야 합니다. 미국 내 학교의 학생이 되는 건 수많은 방법 중 하나죠. 그날 모두의 마음속에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매여 있었습니다. 신분유지를 위해 찾아온 상담학교에서의 2년이 지나고 어느덧 졸업을 몇 시간 앞둔 심정.
삼십 분 가량 시간이 남았을 때, 이번 학기에 배운 내용 중 무엇이든지 함께 나누고 싶다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한 학생이 종교 중독에 관한 자기 생각을 꺼냈습니다. 이번 학기 중독 수업을 통해 종교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소기의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겠느냐란 질문을 자신에게 하게 되었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 고백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막힌 담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습니다. 모두가 공감하는 질문이 만들어졌습니다. 참된, 그러니까 바른 종교 생활은 무엇인가?
참된 종교 생활은 취미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취미 생활은 시간이 남아돌아 따분함을 이겨내기 위해 하는 심심풀이 놀이류가 아닙니다. 제게 취미 생활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귀한 시간을 쪼개어 떼어 놓고, 그 시간을 지켜 잘하고 못하고에 집착함 없이 꾸준하게 해 나가는 자기 조절과 자기 극복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취미 생활에서만큼은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돈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그 차이점이 분명해지는데, 돈을 받는 순간 우리의 행위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게 됩니다. 돈을 멀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함 그 자체에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 삶에서 필요합니다.
그때 한 목사님이 손을 들며 “근데, 그건 아니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의 고개가 그 목사님께로 휙 하고 돌아갔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거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포기해야 하고, 우리가 그걸 해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게, 그게 바로 은혜자 성령의 은사 아닙니까? 그런데, 교수님은 지금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건 잘못된 신앙생활이죠.” 제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포기. 자기 포기. 그게 사도 바울이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지중해 연안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한결같이 하는 말은 너네들 모두 나처럼 충실하게 신앙생활 해봤니예요. 그만큼 해 본 후에라야 포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목사님이 다시 제 말을 받아 무언가를 말씀하려 하시자 다른 한 학생이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끼어들어 바른 신앙생활에 대한 논쟁을 일단락지었습니다. 자칫하면 감정싸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가 아닙니다. 어떻게 다르게 새롭게 예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해서 전 제 견해를 밝혔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님의 입장을 가지고 계신 거죠.”
그다음 날 화요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성경책을 꺼내 읽는데, 신비롭게도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12장에서 똑같은 문제에 대해 자기 뜻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휘둥그레진 눈과 놀라서 열린 입으로 사도 바울의 생각을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2:5~8)
징계는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꺼내서 같은 부분을 찾아 읽으면 한글로 징계라고 번역한 단어가 ‘훈련 혹은 단련discipline’임을 알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징계와 단련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징계가 잘못을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단련은 더욱 나아지기 위해 자신을 어려운 상황 속으로 몰아 넣는 행위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징계를 단련으로 바꾸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사랑하는 이를 훈련하시고 단련하려고 채찍도 사용하신다고 읽어야 합니다.
요즘 제 마음에는 두 가지 문제가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논문 제2장을 쓰기 시작하는 게 첫 번째 문제라면, 5월 13일 토요일 유도 승단 심사 대회에 참가하는 게 두 번째 문제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누구도 저보다 논문 2장을 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저보다 유도 승단 심사 대회에 참가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결정했습니다. 제가 원했습니다. 제가 원해 결정을 내리고 나니 해야 할 게 명백해졌습니다. 논문을 쓰기 위한 글 재료를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책에서 책으로 꼬리에 꼬리를 따라 중요한 개념을 찾아 상상력의 세계 곳곳을 다녔습니다. 유도 승단 심사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유도장에서 보내는 시간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제가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두려움 또한 마음속에 있습니다. 제가 쓴 논문의 통과 여부를 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심사위원인 세 분 교수님의 요구와 지시에 따라 수정을 거듭해야 합니다. 유도 승단 심사의 결과 또한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그대로 잘한다고 생각할 때 저보다 더 잘하는 상대를 만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이쯤에 이르면 ‘포기할까? 아니면 계속 훈련하여 단련할까?’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신앙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영적 운동에서도 자기 포기와 자기 훈련이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신앙도 삶도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를 놓고 아직 갈등하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야고보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1~3)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합시다. 온 정성과 힘을 뜻하는 ‘최선(最善)’이란 말은 본래 ‘가장 좋고 선한 상태’를 뜻했다는 걸 기억합시다. 최선을 다하려면 우리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려면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건 무엇인지 또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다는 건 신앙인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한 예수님의 신비를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보여준 신비는 요나의 기적처럼 자기 변화, 자기 극복이었다는 걸 명심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그 이상 혹은 그 너머의 일은 하나님께 겸허하게 맡기는 한 주를 삽시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주변 탓하고 사람 탓하며 사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최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 한 주 최선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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