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 후 제7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마음이 떨어질 때
지난주 화요일 저녁 식탁에 앉아 저녁밥을 먹는 제게 처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 손전화기를 건넸습니다. “지누, 학교 교장 선생님한테서 편지 왔어요.” “왜요?” “음… 지누가 친구를 초크choke했데요.” 여기서 초크라는 단어는 한글로 목을 조르다입니다. 학교에서 지누가 누군가의 목을 졸랐다는 말이죠. “왜 그랬데요? 진짜 졸랐데요?” “조를 뻔한 걸 선생님이 봤데요.”
지누는 저처럼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해서 다른 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유심하게 잘 관찰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다른 이가 하는 말과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이후로 때때로 지누는 친구들이 자기를 놀리는 걸 힘들어했습니다.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말장난으로 친구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건 일상이었는데, 어느 순간 ‘집단 따돌림’, ‘왕따’라는 단어가 생긴 이후로는 아이들 사이에 오가는 말장난과 몸장난은 더는 장난이 아닌 법적 제재가 가능한 위험한 행동이 되었습니다. ‘지누가 학교에서 친구의 목을 졸랐다. 무슨 일일까?’라 생각하며 처가 건넨 손전화기로 지누 학교 교장 선생님이 보낸 굉장히 형식적인 편지를 읽었습니다.
오늘 지누가 한 아이의 목을 조를 뻔했습니다. 그런 행동에 대한 벌로 지누는 내일 휴식 시간에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누가 목을 조를 뻔한 아이랑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혹시나 질문이 있으면 해주세요. 끝.
뭔가 이상했습니다. 왜 목을 조를 뻔했는지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누는 매 주일 함께 가는 교회에도 저보다 한 살 많은 형이 자꾸 괴롭혀 힘들어 하는 중이었습니다. 이주 전 그런 어려움을 드러낼 때, 제가 말했습니다. “지누야, 니가 정말 그런 괴롭힘이 힘들고 어려우면 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네가 배운 유도 기술을 사용하는 게 좋을 거 같다. 하지만 상대방이 다치면 안 되니까 안전하게 기술을 사용해라. 그냥 겁만 주는 거다. 알겠지?”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27장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호소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해 떠나는 여정 중에 생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등장하는 모습을 사람들 대부분은 다메섹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바울은 조금 더 일찍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사도 스데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때, 이 행위가 종교법에 어긋나지 않음을 증언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젊은이가 사울입니다. 사두개파 사람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주신 율법을 지키는데 철저했습니다. 부활의 가능성을 애당초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가르쳐준 삶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증오했습니다. 다메섹에 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다 잡아 교도소에 넣으려는 마음으로 길을 떠난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됩니다. 다메섹을 향한 여행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첫여행었다면 이탈리아를 향한 여행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한 마지막 여행입니다.
언젠가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까? 전 어렸을 때, 사람들이라고 배웠습니다. 사람들, 곧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차분하게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보신 분은 특별한 한 무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장본인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들이 어떻게 폭력에 감염된 군중심리를 끌어내는지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이 유대인의 종교법 말고는 달리 죄를 지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기에 놓아주려 할때 한사코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변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하자 이를 극도로 경계한 이도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갔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들은 사도 바울을 정치범으로 몰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몰랐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였다는 사실을. 자신이 법 앞에서 정당함을 스스로 변호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고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재판권은 로마 황제에게로 넘겨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무죄임을 황제의 입을 통해 증명하려 했던 거죠.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극복하여 죽음의 잔을 스스로 마셨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자기 손에 주어진 모든 걸 다 사용하려 했습니다.
지누가 학교에서 한 친구의 목을 조를 뻔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 걱정보다는 안도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처에게 처음 말했을 때, 처는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오늘 밤에 제가 지누랑 이야기할 테니까, 당신은 아무 말 하지 마세요.”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책을 보고 있는 지누를 불러 거실 바닥에 앉혔습니다. 서로를 마주 보며 함께 무릎 꿇어앉은 후 제가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냐? 왜 친구의 목을 조를 뻔했냐?” 지누가 대답했습니다. “친구 두 명이 수학 시간 내내 날 놀렸어요. 너무 화가 나서 목을 조르며 겁을 좀 주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보고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수업 후 쉬는 시간에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서 그 아이에게 다가가 목을 조르려 했어요. 그런데 다른 친구 한 명이 선생님께 일렀어요.” “잘했다! 이왕 혼낼 거면 저번에 그랬던 거처럼 유도 기술로 바닥에 던져 버리지 그랬냐? 참, 그 아이는 어땠냐? 깜짝 놀랐냐?” “내가 보니까 많이 놀랐는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목조르기 기술을 걸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누야 그건 잘한 행동이지만 동시에 잘못한 행동이야. 왜냐하면, 첫째, 사부님이 말씀하시듯이 유도 기술 특별히 조르기와 꺾기는 유도장 밖에서는 하면 안 된다. 알잖아? 그건 아주 위험한 기술이란 걸. 둘째, 아빠가 항상 말했듯이 화가 나서 누군가를 때리면 안 된다. 이왕 때릴 거면 선생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거듭 확인해서 모든 걸 안전하게 끝냈어야지. 네가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던 거다. 알겠지?” “이제 자도 돼요?” “아니, 이리와!” 지누를 품에 꼭 안아주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네가 잘못한 거 없다. 놀리지 말라고 하면 안 놀려야지. 그렇게 끝까지 널 놀렸으니 네가 기분 나빠지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넌 너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거다. 네가 잘못한 거 없다.”
사도 바울이 탄 이탈리아를 향하던 배는 풍랑에 휩쓸려 며칠 동안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바람 따라 바다 위를 떠돌았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날이 며칠간 계속되었다는 말은 다메섹을 향한 여행 중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상황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배에 탄 승객 276명 모두가 앞을 보지 못했고, 풍랑 속에서 삶을 향한 기대를 접었습니다. 바로 이때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사도행전 27:33-34)”그런 후 바울은 예수님이 유월절 저녁 식사에서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빵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축복기도를 올린 후 떼어먹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사도 바울을 따라 빵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 떨어진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뱃속을 채우지 않았고, 낙심한 그들의 마음을 먹였습니다. 용기를 먹였습니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난 후 선생님께 인사하고 저에게로 웃으며 걸어오는 지누를 보자마자 제가 물었습니다. “지누야, 어땠어? 오늘 그 아이 완전히 집어 던졌어? 유도 기술 제대로 걸어서 땅바닥에 납작하게 던졌어?” 지누가 씩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아주 나이스해져서 기분이 좋아요!” 지누와 손뼉을 마주치며 다시 제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잘했어! 바로 그거야!” 예수님은 낙심한 사람을 살리셨죠. 죽어버린 마음을 살리셨죠. 사도 바울도 두려움에 휩싸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을 살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살렸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살면서 살려야 할 건 죄에 빠진 죄인이 아니라 죄성에 빠져 죽어버린 마음입니다. 율법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예수님의 지혜를 우리가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은 죽이지만 복음은 살린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 번 더 곱씹을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번 한 주 옳고 그름을 뛰어넘어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을 떨어뜨릴 때, 그 마음을 살려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율법은 죽이고 복음은 살린다는 말을 곱씹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도, 사도 바울이 한 일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살리는 일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는 일이란 걸 배웠습니다. 이번 한 주 살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율법보다는 복음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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