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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2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7. 2. 1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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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후 제6주: 녹색)



말씀: 사도행전 2:14~21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함께 모인다는 건

      요즘 전 공부 중인 드류신학대학원에서 이번 학기에 열린 상담학 개론 수업 조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 지도 교수님 수업인데, 작년에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을 때,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에 힘입어 고맙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들은 수요일 오전에 두 시간 삼십 분가량 모여 앉아 목회와 상담 기본 지식을 배웁니다. 수업에 임하는 제 태도는 학생으로 교실에 앉아 있을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하고 있는지, 수업 흐름이 원활하게 잘 흘러가고 있는지도 수시로 확인해야 합니다. 학생 중 누군가 예기치 않은 질문을 하면 교수님의 답변을 들으면서 나라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도 상상합니다.


      지난주에 세 번째 수업을 했을 뿐이지만, 첫 시간부터 눈에 띈 짜증스런 장면은 두 번째, 세 번째 수업에서도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그 짜증스런 장면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건 함께 모여 있지만 저마다 다른 곳에 있는 학생들입니다. 첫 시간부터 학생들은 교수님의 말과 다른 학생의 말에 귀 기울이는 걸 어려워했습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아 보였습니다. 잠깐 짬이 나면 학생들의 손은 이내 똑똑한 손전화기에 갔고, 교수님의 수업을 듣다가 약간의 지겨움이 몰려오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용 컴퓨터를 통해 누리망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시대에 자라나는 아이들은 수많은 걸 한꺼번에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멀티태스킹, 다중작업이라고 하죠? 수업 시간에 제가 관찰한 학생들은 한결 같이 다중작업으로 바빴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친구 여섯 명과, 그러니까 여섯 개의 대화창을 열어두고,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학생도 있었죠. 강의를 컴퓨터에 받아적는듯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수업 숙제를 하고 있기도 했죠.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함께 한 자리에 앉아 한가지 주제를 놓고 함께 생각을 모이는 게 수업의 목표였지만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요즘 전 매주 수요일 아침에 실감합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요한복음에 그려진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하신 일에 대해 곱씹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삼 일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현상을 보고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게 틀림없다고 했지만,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의 부재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불어오는지는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아시죠? 혹시나 잘 모르시겠으면 세월호 참사로 한국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모순투성이인 한국 사회를 잠깐 떠올려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요한복음 속 제자들은 자신들을 이끈 지도자가 사라지자 자신들이 원래 살았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갑니다. 갈릴리 호숫가로.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사실 아시죠? 제자들은 가장 낮은 곳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 말은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과 연관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 마음속 희망과 절망의 높낮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낙심하여 꿈을 접고 과거로 돌아간 제자들을 예수님은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욱 사랑하느냐?” 여기서 이 사람들이 누군지에 관해 신학자들은 수많은 가설과 의견을 제시합니다. 전 단순하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로 내려간 다른 제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갈릴리로 가겠다는 말을 가장 먼저 내뱉은 이가 베드로였고 다른 제자들은 그를 따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곧 갈릴리로 돌아가는 여행 중 지도자는 베드로였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여행의 지도자가 예수님이셨다면 이를 포기한 후 다시 고기잡이가 되는 여행의 지도자는 베드로였죠.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건넨 질문은 제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왜 예수님은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왜 내가 한 말을 다 까먹었느냐?” “, 임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삼 년 동안 열심히 가르쳤더니 고작 한다는 게 고기 잡이로 되돌아가기냐?”


      질문거리가 많으셨을 텐데, 예수님은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을 곱씹으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님의 사랑은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입니다. 그럼 베드로에게 건넨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야, 너도 날 위해 목숨을 포기할 수 있느냐?” 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예수님이 좀 잔인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나도 했으니 너도 해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셨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결코 그런 무서운 질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문득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바울이 한 사랑에 대한 정의가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제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알았고 만났습니다. 역시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의미는 알 수가 없는 거 같습니다.


      네 양을 먹이고, 이끌고, 다시 먹이라.” 이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의미입니다. 성격 급한 베드로는 두 번 세 번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예수님이 듣고 싶은 걸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연거푸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먹이고 싶은 걸 먹이고, 네가 데려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가지 말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걸 먹이고 그들이 꼭 가야 할 곳으로 데려가라. 그래야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첫 마음과 첫 생각과 첫 행위를 잊지 않고 지킬 수 있단다.”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감리교신학대학교 옛날 기숙사가 생각납니다. 종합관 건물 지하에 만든 기숙사는 아주 옛날에 지은 건물답게 어둑어둑한 백열등, 나무 판자와 철근으로 만든 이층 침대 두 개와 철제 서랍장 네 개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준 교도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였습니다. 좁은 공간에 네 명이 함께 생활했고, 좁은 기숙사에 150명가량의 학생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어딜 가나 사람들과 부딪혀야 했고, 군대를 다녀온 형들에게 갓 입학한 저는 끝없이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갑과 을은 학번으로 정해졌고, 을은 갑을 무조건 잘 모셔야 했습니다. 방학 중 잔류하는 학생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기숙사 식당이 문을 닫으면 방구석에 밀어둔 전기밥솥을 꺼내 손수 밥을 지어 먹거나 그게 귀찮으면 아침밥은 늦잠으로 건너뛰고 재정이 넉넉하면 점심 겸 저녁을 시켜 먹었고 재정이 부족하면 라면 밥으로 기나긴 방학을 견뎌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 그런 환경이 싫어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교회 중 하나인 광림교회에서 지은 기독교 학생 기숙사 인우학사에 들어갔습니다. 세련되고 깔끔하게 지어진 건물, 푹신한 침대, 365일 먹을 수 있는 밥과 간식.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살가움은 없었습니다. 배부름과 정. 배고픔에는 정이 담겨 있었는데, 배부름에는 정이 없었습니다. 불행 속에는 연민이 있었는데, 행복 속에는 연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배부름을 포기하고 배고픔을 택했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곳에 모여 부족한 음식으로 서로를 먹였고, 실수투성이였지만 서로서로 감싸며 이끌어 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유대교 수장절을 기념하는 날 그들은 신비한 경험을 합니다.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인 수장절은 유대교 추수감사절입니다. 함께 모여 룻기를 읽으며 추수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날이 유월절로부터 정확하게 50일째 되는 날, 곧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수장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인 예수님의 제자들을 품어 안았습니다. 모세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10가지 계명을 건네신 하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품에 안아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던져진 이들, 가장 마음속이 가난한 이들, 가장 머릿속이 복잡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다음 날 베드로는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당당하게 두 발로 서서 외쳤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사도행전 2:14)” 베드로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모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후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열두 제자는 예루살렘에 함께 모였습니다. 몸만 함께 있었던 게 아니라 마음을 함께 모았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고 자랑할 게 없는 서로의 생각과 뜻을 주고 받으며 서로서로 이끌었을 때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병이어 기적을 자신들이 직접 할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죠.


몸이 아니라 마음이 함께 모이는 데 관심을 두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가 우리 주머니에 넘쳐나는 이때 말과 행동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이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만남과 관계를 넉넉함이 아닌 부족함으로, 배부름이 아닌 배고픔으로, 화려함이 아닌 소박함으로 이루어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유대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건 오순절 다락방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기다렸고 무조건 기다리며 하나님께 달라고 매달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당신의 영은 넉넉함과 똑똑함과 화려함을 포기한 후 모여서 서로서로 먹이고 이끄는 공동체 속에 찾아온다는 걸 배웠습니다. 함께 할 가능성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함께 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를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함께 모이기 위해, 진심이 함께 모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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