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8:10~17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1
지난 주일 영어 회중 예배 시작 시각을 기다리며, 특별한 기대 없이, 전 여느 때처럼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하우 아 유?” 다른 나라 말을 배우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는 건 사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언어와 함께 만든 삶의 방식을 배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우 아 유?”라는 말은 말하는 이가 듣는 이가 처한 삶의 상황, 특별히 금전과 건강에 관련된 상황이 어떤지를 묻는 인사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보통 듣는 이가 그럭저럭 잘살고 있겠다란 추측에 근거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인사를 할 때 다른 말을 사용하죠. 안녕하세요? 안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이 짧은 말 속에서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한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나라를 이룩한 후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이웃 나라들의 끝없는 침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중국의 다양한 민족이었지만, 근대로 오면 일본과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이 이 침략 경주에 끼어듭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한국 사람들이 아침에 나누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는 실은 지난밤 별일이 없었는지를 확인하는 말입니다.
2
어쨌거나, 뭐 특별한 기대 없이, 전 예배당에 들어오는 교인에게 “하우 아 유?”하고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 “좋았어요. 혹은 나쁘진 않았어요. 목사님은요?”라는 답변을 듣지요. 그런데, 지난 주일 한 분은 제가 한 “하우 아 유?”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말 좋지는 않았어요. 끔찍한 한 주였죠.” “왜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하고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제 가족이 푸에르토리코에 살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허리케인 마리아에 대해 제가 보고 들은 게 새롭게, 정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허리케인 일마가 플로리다 주를 강타했을 때 약간의 즐거움과 흥분을 가지고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확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일은 제 일상에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인 한 분이 당신의 가족이 푸에르토리코에 사는데 이 주 전 금요일까지 가족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를 못했다고 말하기 전까지, 전 허리케인 마리아에 대해서도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허리케인 마리아가 푸에르토리코를 강타한 후 사흘 간 그분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가족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그가 보낸 사흘에 관해 들으면서 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분은 피곤해보였지만 조금은 안도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가족은 안전했고 사는 집이 상대적으로 해를 많이 입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죠.
3
그다음 날 전 제가 주중에 일하는 드류대학교 도서관 보존부서에 잠깐 들렀습니다. 직장 동료 한 명이 무척 피곤해 보였습니다. 역시나 특별한 기대 없이, “하우 아 유?”하고 물었습니다. “피곤하고 지쳤지.” “무슨 일인데?”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가족이 푸에르토리코에 있어! 허기로 죽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도울 생각을 안 해!” 허리케인 마리아는 이렇게 저를 두 번 강타했습니다. 그다음 날 전 성인 남성 한 명이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건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4
요즘 우리는 비극이 발생한 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받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장소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인터넷 문화로 무장한 대중매체의 힘으로 인해 가상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곳에 실시간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편리가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사는 곳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너무 잘 알다 보니 이제 우린 그 장소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너무 쉽게 지겨워합니다. 허리케인 마리아가 푸에르토리코를 강타했고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그 비극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기대감이 밀려옵니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일까요? 그래서 컴퓨터를 켜거나 손전화기를 꺼내 끝이 없는 가상 현실 속에서 비극에 관한 한없는 가상 정보를 찾아 헤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새롭고 자극적인 소식이 계속해서 알려지는 한 우리는 비극에 대해 걱정합니다. 하지만, 비극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지겨워진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듯이 우리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5
하나님에 대해 지겨움과 무관심이 뒤섞인 감정을 느낀 이가 야곱입니다. 전 성경이 인간의 개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최초의 책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해 생각할 때, 성경책에서 그들의 개성을 직접 설명하는 구절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묘사만 있습니다. 그걸 차분하게 읽다 보면 그들의 개성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가 세상으로 나올 때, 야곱은 형 에서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슬쩍 읽으면, 야곱이 한 이상한 행동에 담긴 뜻을 생각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형 에서의 발목을 잡고 태어난 야곱에 대하 묘사가 실은 야망이 가득한 야곱의 품성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립니다. 성경책은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자라나는지도 설명합니다. 에서가 훌륭한 사냥꾼이 되어 대부분 시간을 들판에서 보냈다면, 야곱은 집 밖을 나가는 일이 잘 없는 온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세심하게 읽으면 에서와 야곱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는 구절 속에서 형제간의 불화가 실은 남편 아내 사이의 불화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6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죠! 형 에서의 발목을 붙잡은 야곱은 아버지의 발목도 붙잡습니다. 히브리 말로 발목을 붙잡는다는 속이다 혹은 사기를 친다는 말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로 되어 있는 걸 독차지하고 싶은 야망 때문에, 야곱은 먼저 자신이 만든 음식을 사용하여 형의 장자권을 훔쳤고, 형 에서로 분장하여 아버지가 형 에서를 위해 준비한 기도를 훔쳐 받았습니다. 전 야곱을 죽이고 싶을 만치 분노한 에서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조직적이고도 점진적으로 형을 속였습니다. 리브가는 사랑하는 둘째 아들을 살리고 싶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형에 대한 두려움이 야곱이 집을 떠난 첫 번째 이유입니다. 흥미롭게도, 집을 떠남으로써, 야곱은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갑니다. 낯선 세계에서, 난생처음으로, 할아버지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을 직접 만납니다.
7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어떻게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야곱은 끝을 알 수 없는 광야로 던져졌습니다. 해가 지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습니다. 야곱은 그날 밤을 보낼 장소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삶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만 보냈기에 광야에서 사는 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광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야곱은 자신이 서 있는 장소에서 돌을 하나 찾아 집어 들어 머리맡에 놓은 후 그곳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그 끝이 하늘에 닿는 사다리가 하나 땅에 세워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도 보았습니다. 사다리 위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창28:13-15)
8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야곱은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 걸 난 몰랐었구나!” 이게 야곱이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 계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란 사실은 놀랍습니다. 미래를 위해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인 산산이 조각나기 전까지 야곱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믿기는 했겠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야곱은 외쳤습니다. “이 장소 진짜 대단하네!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집이야. 여기가 하늘문이야!”
9
야곱의 여행은 여기에서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은 야곱이 한 여행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걸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을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꿈속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봤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창 28:13)”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야곱은 주의해서 듣지 않았습니다.
10
왜 야곱은 광야를 걷다가 삶을 마감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그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가 들어가서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알려주실 거라는 희망을 품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야곱의 삶에서 하늘문이 있는 곳은 그가 두려움에 주저앉은 그 순간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어 멈춘 자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착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여기이고 지금입니다. 하늘문이 여기이고 지금입니다. 내일이, 가족과 재정 상태가 염려될 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정말 지겨워서 떠나고 싶은 곳이 바로 하늘문이 있는 장소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새기는 기도
하나님, 오늘 야곱이 집을 떠나 처음으로 당신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은 우리가 더는 무언가를 기다릴 수 없는 초조한 때란 걸 알았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더는 우리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란 걸 알았습니다. 하늘문이 어디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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