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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이기는 건?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20. 12. 1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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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에서의 품에 안기다.

 

창세기 33:1~20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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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제가 살아 있는 한 잊을 수 없는 6일이었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미주특별연회 제24회 연회에서 18년 동안 해 온 전도사 생활을 마감하고 정회원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고 절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재밌는 성극도 보며 볼티모어에서 펜실베이니아로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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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전 부모님과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가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유치원을 다닐 때로 기억하는데, 아버지랑 누나 둘 그리고 저 이렇게 부산 어린이 대공원에 다녀온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인 거 같습니다. 어린이가 경험하는 세상은 가정이 전부이기에 전 대부분의 가정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리고 자라보니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한평생을 운전대를 붙잡고 살아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사시는 아버지. 반평생을 예배당에 엎드려 지내셨고 지금도 그렇게 사시는 어머니. 그렇게 생각하면 제겐 교회는 가정과는 다르지만 어쩌면 가정보다 더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어머니에게 혼이 날 때면 몰래 도망가 혼자 숨어 있는 곳이 교회였고. 텅 빈 예배당 의자에 혼자 누워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선풍기를 바라보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고민을 곱씹을 수 있었던 곳도 교회였습니다. 

 

3

신앙인은 삶의 패배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힘이 없고 능력이 없으니 결국 하나님이란 보이지 않는 대상을 마음속에 만들어 의지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종교도 하나의 사업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교인이 많은 교회를 담당하면 그만큼 큰 집에 살 수 있고 많은 돈을 벌 수 있기에 나름 행복한 삶을 꾸려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교회를 맡을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교회를 떠나 사회로 들어가려고 몸부림친 적도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대면하고 살고 싶었는데, 안수식 교리문답을 위해 자리에 섰을 때 ‘이제야 비로소 이 자리에 서 있구나!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고 저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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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특별연회의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한국에 계신 전용재 감독 회장님이 미국에 오셔서 제 24회 연회와 목사안수식을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택한 설교의 제목은 감독 회장님이 저를 포함한 새내기 목사 10명에게 교리 문답한 내용 중 한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감리교 목사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감독 회장님은 “악은 선으로 이기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제 마음속에 확 들어와 심장에 박혔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어떻게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을까?’ 저 자신에게 물었고 지금도 묻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살아갈 제 삶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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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이기십시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악을 선으로 이긴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아니면 들은 적이라도 있습니까? 전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있지 않습니까?”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성경책을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예수님도 악을 선으로 이긴 것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제사장들과 예수님이 행한 논쟁에 대한 성경 구절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는 이기지 않으셨지만, 악을 선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으셨고 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던진 말장난 덫을 지혜롭게 혹은 교묘하게 빠져나가서 전혀 생각지 못한 선언으로 도리어 그들을 자신들이 만든 말장난 덫에 가두셨습니다. 성전을 사업장으로 만든 이들은 채찍을 휘둘려 성전 밖으로 쫓아내셨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말없이 다가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도우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 중심에 놓인 믿음의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 그들을 못 본 척하셨고 그들이 하는 말을 못들은 척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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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희생의 대명사, 자기희생을 통한 부활의 대명사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삶에서도 선을 악으로 이긴 경우를 찾기 힘들다는 걸 사실로 인정하고 나면 성경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살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기보다는 악으로 악을 이긴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시다시피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기 생명을 세 번이나 보존하려 했습니다. 그의 손자 야곱은 한평생을 남보다 더 많은 걸 소유하기 위해 항상 불안에 떨며 살았습니다. 꿈의 사람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했습니다. 다혈질의 사람 모세는 화를 참지 못해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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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이긴 사람이 정말 성경책에 있느냐란 제 질문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를 생각할 때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서는 동생 야곱이 자기에게 행한 악을 선으로 싸워 이겨낸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싸움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창세기 27:41)”

 

이 말을 들은 리브가는 다시 한 번 기지를 발휘해 야곱을 자신의 오빠 라반이 사는 밧단아람으로 보냅니다.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야곱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날은 형 에서의 분노가 가라앉은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8장에는 우리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에서가 그려져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에게 간 이유가 가나안 여자가 아닌 이스라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라는 걸 깨달은 에서입니다. 즉, 아버지 이삭은 자신이 아내로 삼은 가나안 여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에서가 깨달았습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세기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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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이상 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에서는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하 400명을 데리고 야곱을 맞이하러 갔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33장에는 야곱과 에서의 재회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며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는 야곱을 마주한 에서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안기였습니다. 누군가를 안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 하지 않고는 다른 이를 안을 수 없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그냥 안지 않았습니다. 목을 어긋 맞추었습니다. 동생 야곱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여 있는 그대로의 야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후 입을 맞추었습니다. 우린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 입을 맞추는 걸 건 치욕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에서는 야곱을 안았고 인정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서는 울었습니다. 한 참을 운 후 에서는 야곱에게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네 주변에 서 있는 이 여인들과 아이들은 누구냐?”가 첫 번째 질문이고 “내가 널 만나러 오는 길에 만난 여러 떼는 대체 무엇이냐?”가 두 번째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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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명의 부하를 데리고 광야로 나온 에서의 머릿속에는 야곱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준비한 선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거느린 식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속히 만나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이는 쌍둥이 동생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을 향한 그의 분노가 언제 어떻게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에서는 야곱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야곱이 자신에게 행한 악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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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여행에 동참한 하나님은 에서의 여행에도 동참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분노와 상처, 좌절과 절망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40년이 걸렸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기 위해서 에서가 필요했던 시간이. 40년이 필요했습니다. 분노와 상처, 좌절과 절망을 해결하는 데 소요한 세월이. 우리 또한 남은 삶의 시간 동안 악을 선으로 싸워 이기는 연습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새기는 기도

하나님, 다른 건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우리가 만약 우리 마음속에 가득한 악을 선으로 싸워 이길 수 있다면 우리의 모습이 곧 당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걸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는 날 우리의 마음 또한 당신의 마음이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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