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최초로 트리플 액슬 점프Triple Axel Jump을 경연대회에서 성공한 타냐 할딩Tonya Harding은 네 살 때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감독 그레이그 길레스피Graig Gillespie는 타냐의 삶을 영화에 담으면서 일반 영화와 기록 영화를 교묘하게 뒤섞은 희극-기록영화 기법mockdocumentary or docucomdey을 사용했다. 이 기법은 영화 속 등장인물이 연기하면서 동시에 증언도 하는, 영화 속 줄거리를 따라 움직이지만 동시에 영화 밖으로 나와 영화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관객은 영화 안과 밖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영화는 타냐의 엄마 라보나 골든LaVona Golden 씨가 딸과 함께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들 지누는 이내 내게 말했다. “아빠, 이거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데요.” 처음엔 나도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타냐에 대한 자기 생각을 증언할 때, 감독이 의도한 전략이란 걸 알았다.
한 인물의 삶에 관한 영화는 심리학적 세계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보통 주인공의 어린 시절은 평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심리학적 통찰이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내가 타냐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봤는데, 그레이그 감독은 이 케케묵은 심리학적 담론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타냐의 엄마 라보나는 매사에 불만이 많고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부정적인 면만을 보며 살아간다. 네 살짜리 딸아이를 스케이트장에 데려가서 즐겁게 놀라는 말대신 자신이 일해서 번 모든 돈을 딸 스케이트에 투자하니 제대로 잘해야만 한다고 협박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소변이 마렵다는 딸을 화장실에 보내지도 않는다. 왜? 스케이트 연습해야 하니까. 결국, 타냐는 스케이트장에서 옷에 오줌을 지리고, 엄마는 그런 타냐를 화장실로 데려가 마구 때린다. 화장실에 들어온 한 여자가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뭘 보는데?”라며 도리어 화를 낸다.
그레고리 감독은 타냐의 소녀 시절에 마침표를 타냐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떠나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소녀 타냐가 청소년 타냐로 변해야만 하는 순간이다. 청소년 타냐는 엄마를 증오한다. 하지만, 엄마를 무척 닮았다. 엄마에게 배운 담배, 틈만 나면 피운다. 학교도 관두고 스케이트만 연습하다 보니 성적이 분에 차지 않으면 심판 앞에서 화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스케이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재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밭을 가지지 못한 타냐에게 스케이트는 즐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겨서 지배해야 할 대상이다.
엄마 라보나의 억압을 견디지 못한 타냐는 남자 친구 제프 길루리Jeff Gillooly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떠나고, 얼마 후 그와 결혼한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주먹질이 오갔고, 총질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헤어지지 않았다. 헤어졌지만, 시간이 지난 후 둘은 다시 함께 살았다.
타냐는 미국 피겨 스케이트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인물이다. 경연대회에서 최초로 트리플 액슬 점프를 성공했으니까. 타고난 신체조건과 실력을 바탕으로 타냐는 미국 최고 피겨 스케이터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 피겨 스케이트 협회가 추구하는 이상에 어울리는 옷차림이나 행동을 하지 없었던 타냐는 “실력만 있는 쓰레기White Trash”가 돼버렸다.
1992년 겨울 올림픽에서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트리플 액슬 점프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종합 성적 4위.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사용한 돈을 국가로부터 보조받을 수도 없게 된 타냐는 엄마 라보나처럼 식당 종업원으로 살기 시작한다. 그때 옛 코치 다이엔Diane이 1994년 겨울 올림픽에 참가하길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타냐는 다이엔의 지도로 열심히 연습한다. 하지만,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마주쳐야 할 낸시 케리건Nancy Kerrigan을 견제하기 위해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협박을 좀 하려 했는데, 협박하려고 낸시를 찾아간 한 남자는 낸시의 무릎을 부러뜨린다. 미연방수사국 FBI는 사건의 경위가 하나둘 밝혀냈다. 그와 중에 1994년 겨울 올림픽을 8위로 마친 타냐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법정에 출두했고 피겨 스케이팅 대화 참가 자격을 영구히 박탈당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케이트를 탈 수 없게 된 타냐는 스케이트장이 아니라 사각의 링에 오른다. 피겨 스케이터에서 권투 선수로 변신했다. 권투 선수가 트리플 액슬 점프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영화는 상대방이 휘두른 큰 주먹을 얼굴로 받아낸 타냐가 하늘로 떠오른 후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느린 동작 효과를 사용해 트리플 액슬 점프와 교차 접목하여 보여준다. 상대방이 던진 주먹에 맞아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 타냐는 스케이트 장에서 트리플 액슬 점프를 성공할 때 느낀 그 짜릿함을 다시 느꼈다는 말인가?
내가 타냐다 영화는 한 인간의 삶을 한껏 비꼬아서 바라보지만 동시에 그 인간의 무지함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타냐는 삶에서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성공과 실패,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닐까? 성공과 실패에 집착하기보다는 트리플 액슬 점프에 집착하는 게 더 현명한 삶이 아닐까? 타냐는 또다시 트리플 액슬 점프를 시도할 것이다. 스케이트 장이 아니라 삶이란 무대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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