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0일 토요일 저녁. 처와 함께 영화를 한 편 보고 싶었다. 미누와 지누에게 아마존 킨들Amazon Kindle을 건네며 말했다. “아빠랑 엄마는 지금부터 영화를 한 편 볼 것이니 너희들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음껏 만화를 볼 수 있다.” “예스!” 둘은 서둘러 방 이층 침대로 올라가 만화 볼 자세를 잡았다. 키위 디스크에 접속하여 최신 한국영화를 찾아 헤매는데 연말 기념 무료 영화라는 표시 아래 <아들에게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 농아聾啞 부부의 일상을 그리는 영화 같았다. 농아聾啞란 청각 장애와 언어 장애를 모두 가졌기에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아내는 한 무용단 소속 무용수였고 남편은 서울 시내 한 공원을 가꾸는 관리원이었다.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를 알아차리면 이제 두 사람이 설레는 마음으로 시골 어느 유치원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아들이 있었다. 둘 다 농아이기에 아들에게 말하고 듣는 걸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일까? 외동아들은 친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들은 장애가 있는 엄마, 아빠를 피했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엄마와 아빠를 싫어했다. 그래서 유치원 차가 할머니 집 앞에 멈추자 유치원 차 뒤를 쫓아오는 엄마, 아빠를 피해 얼른 집안 화장실로 도망가 문을 잠근 후 좀체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아들 원효를 서울로 데려가기 위해 내려왔다.
원효와 함께 서울로 올라온 외할머니는 원효가 잘 때 집으로 다시 내려가셨다. 원효는 이제 엄마,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엄마, 아빠가 사준 장난감 자동차에 건전지가 없는 걸 확인한 후 건전지를 넣어 달라고 외쳤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서울시 한 공원 높은 곳에 이르러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보고 싶어 아빠에게 자신을 안아서 높이 올려달라고 했지만, 아빠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편도선이 붓고 열이 나서 끙끙거리지만, 이마에 손을 대보지 전까지 엄마, 아빠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맛있는 음식점에 앉았지만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고, 그 마음을 엄마, 아빠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엄마, 아빠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래서 원효는 서러움에 북받쳐 울었다.
소통할 수가 없었다. 같이 살려 했지만 서로서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엄마는 원효를 다시 친할머니에게 데려다준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배우는 건 왜 이렇게도 힘들까?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존을 위해 배우는 거다. 야생에서 살려면 언어는 필요 없다. 언어는 문명에서 살려는 인간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도구다. 삶에 대한 적응력은 어른보다 아이가 훨씬 더 뛰어나다. 학자들은 뇌 신경이 계속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엄마를 따라 무용 연습실에 간 원효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엄마의 무용을 바라봤다. 그냥 보지 않고 엄마의 춤을 따라 췄다. 엄마는 수화로 춤을 추고 있었다.
엄마는 자기를 낳아준 엄마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엄마가 어릴 때 엄마의 엄마는 말 못 하는 딸을 아파트 집 밖 복도에 맨발로 쫓아낸 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엄마의 엄마는 자기 딸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단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어서 그랬다. 엄마가 집 밖에서 소리를 낼 수 없어 울고 있을 때, 엄마의 엄마는 집안 현관 앞에 주저앉아 울음을 참으며 울었다. 딸은 소리 없이 울었고, 엄마는 소리 낼 수 없어 울었다.
왜 그랬을까? 엄마는 아들 원효에게 똑같은 벌을 주었다. 원효를 친할머니 집 밖 현관문 앞에다 세워둔 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게 했다. 벌을 주기 전에 엄마는 수화로 원효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냐? 왜 할머니와 엄마에게 나쁜 말을 하냐? 내가 누구냐? 말해!” 원효는 어떻게 그 말을 이해했을까? “엄마가 누구긴 누구야? 엄마지! 왜 그걸 자꾸 물어? 바보같이!” “자꾸 물어?”와 “바보같이!”에서 원효는 수화를 사용했다.
엄마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 엄마의 엄마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 후 온 힘을 다해 한 마디를 내뱉는다. “엄마!” 소통하고 싶은 절박함이, 간절함이 목청을 움직였다.
소통. 소통할 수가 없다고 한탄할 때가 더러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어쩌면 소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할 수가 없었던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절실하게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언어를, 상대방의 수화를, 상대방의 표현방식을 배우지 않았던 거다. 나도 청각 장애와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농아聾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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