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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2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6. 1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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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선교주일, 성령강림 후 제4주: 녹색)



설교자: 이광유 목사


제목: 두 가지 유혹


       지난 한 주간 잘 보내셨습니까? 저의 지난 한 주는 다양한 생각과 가능성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저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를 연거푸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제 주변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번 봄부터 전 한 목사의 욕심이 한 교회를, 그것도 이제는 연로한 어르신들만이 지켜나가는 교회를 한순간에 집어삼켜 사라지게 만드는 현상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중략) 후회스럽습니다.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할 용기가 제게는 없었고 저 역시 교회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야 했기에 침묵과 합리화를 통해 제가 보고 깨달은 바를 틀렸다며 외면했습니다.


       2008년에 시작하여 2012년에 마무리한 4대강 사업을 향해 자연은 올해도 어김없이 그건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녹조류를 보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온 자연이 그건 아니라며 처절하게 고함지르지만, 한국 정부는 4대강 사업은 자연에 혜택을 주기 위해 계획한 것이니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자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한국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계획했던 한국형 뉴딜 정책, 4대강 사업은 그 청사진과는 전혀 다른 악몽만을 우리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악몽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무섭게 우리 삶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들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녹조류로 인해 사라지는 물속 산소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강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물을 가지고 와 강물을 더합니다. 녹조류 현상이 아무리 심각해질지라도 국민의 식수는 안전하니 걱정하지마라며 자신만만합니다. 고도정수처리시설이란 과학기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을 떼려다가 도리어 혹을 더 붙이고 마는 상황을 우리는 지금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파괴행위가 과학기술에 의해 가려졌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제가 종교지도자가 되기 위해 내디딘 첫걸음에 해당하는 감리교신학대학교의 한 선생님은 당신이 논문을 지도했던 한 여학생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그가 지금까지 일구어온 삶의 터전은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분과 여학생의 나이를 생각해 보니 아버지와 딸에 해당했습니다. 그 교수님이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처음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했을 때, 전 그분과 함께 독서 모임을 꾸려 다양한 생각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그분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대표하는 한 교수님이 되셨죠. 그 교수님과 그 여학생 사이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교수의 권위를 사용하여 한 여학생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사실은 그 어떠한 변명으로도 피해갈 수 없는 큰 잘못입니다.


이 세 가지 문제의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요? 무엇이 한 목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3년 동안 일했던 교회를 사라지게 하였을까요? 무엇이 잘 지내고 있는 자연을 더 잘 지내게 해줄 수 있다는 착각을 만들었을까요? 대체 무엇이 한 교수가 자신이 논문을 지도했던 여학생을 학생이 아닌 성적 장난감으로 바라보게 하였을까요?


전 욕심(慾心)이 이 세 가지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 사전에서 욕심이란 단어를 찾으면 그 뜻이 분수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욕심이 이성화 작업, 곧 합리화를 거치면, 욕망(欲望)이 됩니다. ‘무엇을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마음의 상태인 욕망은 다시 합리화를 거쳐 집착(執着: 어떤 것에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이 되고 이게 병으로 발전하면 강박증이 됩니다. 그걸 이루지 못하거나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거죠. 욕심이 욕망이 되고, 욕망은 다시 집착으로, 집착은 결국 강박증이 되는 과정을 이제 잘 아셨죠?


욕심이 사람 죽인다.”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위태로운 일까지 거리낌 없이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구 상에서 숨을 쉬고 사는 생명체 중 욕심으로 인해 살인조차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건 인간밖에 없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주변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을 맹수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요. 사실 그건 잘못된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사자, 호랑이, 표범, 늑대는 욕심 때문에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않습니다. 배가 고플 때만 사냥합니다. 자신의 주린 배가 차면 코앞에서 까부는 토끼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대대손손이 먹고살 돈이 은행계좌에 들어 있어도, 돈 버는 걸 멈추지 않습니다. 지구 상에서 만족하는 법을 잊어버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동물은 인간뿐인 거 같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잠언 9장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지혜의 여인과 무지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둘 다 저녁상을 맛있게 차려놓고 여종을 거리로 보내 손님을 찾고 있습니다. 지혜의 여인이 말합니다.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 5~10)


무지의 여인도 거리로 나가 행인을 불러 모읍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잠언 9:16~17)


이 이야기에서 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삶입니다. 삶의 길 위에서 매 순간 우리는 두 여인의 고함을 듣습니다. 지혜의 여인은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고 외치고 무지의 여인은 두 번 생각하지 말고 욕심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라고 외칩니다. 잠언 기자는 지혜로운 선택은 생명으로 이어지고 지혜롭지 못한 선택은 결국에 가서는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잠언 기자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걸 꽉 붙잡고 살 수 있을 텐데, 그저 지혜로운 선택을 하라고만 말합니다. 그렇다면 잠언 기자는 지혜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잠언 기자가 이해한 지혜는 잠언 8:22~31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기자가 지혜를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22~31)


잠언 기자가 말한 지혜는 자연의 흐름입니다. , 여름, 가을, 겨울. 아침이 오면 점심이 오고, 점심이 오면 저녁이, 저녁이 되면 곧 밤이 시작합니다. 밤은 한없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곧이어 새벽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자연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욕망은 자연의 흐름을 거부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집착은 자연의 흐름을 거부하는 마음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잠언 기자가 말하는 삶의 지혜는 삶은 흘러가고, 그렇게 흘러감 속에서 우리 또한 함께 흘러가야 한다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과 태도에 녹아 있습니다. 흘러감은 끝없는 변화입니다. 삶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까? 그 바람 거역하지 말고 도리어 바람을 타고 움직이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바람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불어왔던 사라지는 성령의 바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지혜로운 삶은 욕심으로 우리를 무장하는 삶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욕심을 욕망으로 만들어 거기에 복종하는 삶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자연의 흐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우리도 함께 흘러가는 삶이란 걸 알았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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