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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5 주일 예배 말씀 나누기

그루터기에 앉아서

by 느긋하게, 차분하게, 꾸준하게 2016. 6. 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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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주일, 성령강림 후 제3주: 녹색)




제목: 돌아서 간다!


       지난 학기부터 전 한국 교회사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박사과정 논문 주제를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심리적 원인으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일어난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알았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역사만큼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학문이 있겠느냔 의문이 듭니다. 지금까지 전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20년임을 굳게 믿어 왔는데, 그게 그리 간단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일본의 학자들은 한국 기독교의 시작을 임진왜란이라고 주장합니다. 임진왜란 때 군목으로 한국에 들어온 스페인 신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의 교회사 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싫어합니다. 식민지 사관과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이 제시하는 역사적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정설로 만들고자 노력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50개 중 27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한국의 역사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함께 놓고 생각하면 심리학을 공부하는 제 관심을 확 사로잡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6ˑ25 전쟁 후 생긴 군부정권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여겨지는 경제개발계획의 성과는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묘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경제발전에서 대기업이 탄생했다면 한국 기독교의 발전에서는 대형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경제발전의 중심부에 군부독재가 있었다면 기독교 발전의 중심부에는 뛰어난 영적 능력을 소유한 소수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 경제의 뒷면에 부정과 부패가 숨어 있다면 눈부시게 불어나는 한국 교회의 뒷면에는 개체교회 중심주의와 기복신앙이 숨어 있습니다. 발전과 부패, 성장과 개체교회 중심주의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게 바로 제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언젠가 제 지도 교수님과 논문에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다 한국 역사에 남아 있는 오점이 친일파 정리작업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경우는 한국과는 달랐음을 강조했죠. 제 말이 끝나자 교수님은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말씀하셨습니다. “친일파 정리 문제를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친일파를 모두 정리한 북한은 인간의 최소 생존권조차 제대로 보장할 수 없는 가난한 독재 국가가 되었죠. 반면에 친일파 문제를 언젠가는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로 생각하는 남한은 어쨌거나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한국의 과거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처음 교수님의 답변을 들었을 때, 제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럼, 먹고 살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내면 과거에 저지른 모든 범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모두가 한 번씩은 곱씹어 보았을 이 문제는 오늘 함께 읽은 잠언서 4장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 곧 친일파는 나쁘기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식이라면, 비록 친일파는 나쁘지만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견은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법 거창해 보이는 이 문제는 사실 사람과 일 중 하나를 택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만 생각하면 일을 놓치고 일만 생각하면 사람을 놓치는 상황을 경험해 보지 않은 분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많은 문제는 사람과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잠언 4:6~9)


       기독교란 종교는 전진을 강요하는 종교입니다. 에덴동산으로 상징되는 영혼의 고향을 다시 찾아야 하는 삶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성경 속 인물은 한결같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은 곧 시작할 하나님의 천년왕국을 기다리며 환상 속에서 영적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참된 기독교인은 손해 보는 기독교인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세상사에는 어두워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짖누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 세상에 남긴 영향력을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셨던 고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잠언 4장은 기독교인은 손해 보는 사람이다는 고정관념이 틀렸음을 알려줍니다. 지혜로운 삶은 괴로운 인생 여정에서 피곤함을 덜 느끼는 삶이고 달려가도 실족하지 않는 삶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마음을 잘 지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잠언 4:23~27)


지혜로운 사람은 굽은 길이 아닌 곧게 뻗은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잠언 기자는 지혜만 있으면 우리의 인생길이 고속도로로 변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곧게 뻗은 길을 단거리로, 그러니까 목표에 조금 더 쉽고 빠르게 도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기자는 곧게 뻗은 길을 만드는 지혜를 아침에 솟아나는 햇살에 비유했고, 굽은 길을 만드는 사악함과 우둔함을 어둠에 비유했습니다. 지혜로운 이의 삶은 지나가는 나그네가 보더라도 그의 겉과 속을 훤히 알 수 있는 삶입니다. 반대로 사악함과 우둔함으로 무장한 이의 속내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므로 내일은 또 어떻게 변할지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색깔을 발할 수 있는 피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 연구소장 로버트 왈딩거 박사가 행복한 삶을 만드는 건 무엇일까요?”란 제목으로 행한 테드 강연을 누리망에서 보았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하버드 대학교는 인간 삶에 대한 한 가지 연구를 시작했고 이 연구는 70년째 진행 중입니다. 당시에 연구 대상자들은 보스턴에 사는 중고등학생이었는데, 그들 중 아직 살아있는 이는 어느새 90세 후반에 이르렀습니다. 연구의 목적은 이들이 한 평생을 사는 동안 무엇이 이들 삶의 행복을 결정하는지를 알아내기였습니다. 이제 1세대 연구 대상자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그들이 낳은 자손들의 삶도 연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살면서 느낀 행복지수가 아이들의 행복지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 결과는 아마도 우리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즈음에 발표될 겁니다.


       어쨌거나 궁금해하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소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삶의 행복은 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삶의 행복은 출세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삶의 행복은 권력에 의해서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삶의 행복을 결정하는 유일한 변수는 살면서 어떤 인간관계를 형성하는지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은 관계를 형성했는지였습니다. 양이 아닌 질이었고 넓이가 아닌 깊이였습니다.


      오늘 잠언 기자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지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찾았으면 세상이 반으로 나뉘더라도 그 지혜를 꽉 붙잡고 살아라고. 사람과 일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면 사람을 택하라고 말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우리 삶의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혜는 우리의 병을 낫게 한다고 말합니다. 로버트 왈딩거 박사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늙은 사람들은 설령 몸은 아플지라도 쾌활함과 평온함을 적절하게 잘 유지할 수 있었지만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한 채 늙은 사람들은 몸이 아프오자 처절함 속에서 허덕였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굽은 길 어두운 길이 아닌 곧은 길 밝은 길을 만들며 걸어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상하게도 직진보다는 돌아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급히 빨리 가려고 하기보다는 천천히 넉넉하게 돌고 또 돌아가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지혜로운 삶은 돌아가는 삶입니다. 빠른 길, 편한 길을 애써 외면한 후 세상 사람이 모두 다 지켜볼 수 있는 아침 햇살과 같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삶입니다. 가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 중에는 미운 사람 한 명 두 명 반드시 있지만, 그 사람들을 없애면 또 다른 미운 오리가 나타남을 알기에 미운 맘 불편한 맘 답답한 맘 넉넉하게 포용하여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가겠습니다. 하나님, 너무 쉽고 편안해 보이고 빠른 길은 과감하게 돌아서 어렵고 느린 길을 택하는 우리가 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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